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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석조전에서 벌어진 비극

2014-10-18

지난 13일, 덕수궁 석조전이 5년 동안의 복원공사 끝에 [대한제국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석조 왕궁으로 지어진 석조전은, 우리 근대사가 겪어야 했던 숱한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슬픈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석조전이 들어선 덕수궁에 얽힌 기구한 사연을 살펴보겠습니다.

덕수궁의 원래 명칭은 경운궁입니다.
왕실 인척이 기거하는 곳으로 정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곳 인근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에
고종이 피신하는 이른바 아관파천 사태가 일어나면서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즉 고종이 언제까지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수는 없는 상황에서,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경운궁 일대에 러시아는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공사관이 밀집해 있어
만일의 사태에 신속하게 피신하기에 편한 장소로서
선택한 것입니다.
경복궁에서 일본 자객들의 난입과 왕비 시해라는
끔직한 일은 겪은 고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관파천 약 1년 만인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새로 수리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곧이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신은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것은 조선이 이젠 청의 속국이 아니며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국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시각적 효과의 하나로 기획된 것이
서양식 왕궁 건축이었습니다.
1900년 영국인 브라운이
같은 영국인 하딩의 설계를 바탕으로 건축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고종의 이러한 자주적인 정치행위에
일본은 초조해집니다.
자칫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마침내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그 직후, 4월 14일 밤,
경운궁에서 원인 모를 대화재가 발생하여
거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탑니다. 석조전 공사도 중단됩니다.
당시 고종은 러일 전쟁의 참화를 벗어나기 위해
대외 중립을 선언하고
미국과 영국 등 열강에게 지원을 요청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이 화재는 일본인들이 저지른 방화라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습니다.
어쨌든 고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주변 열강들과의 비밀협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영향권을 보장받습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이른바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이 조약으로 인해 한국은 외교권을 잃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합니다.
이후 통감부 체제가 되면서 석조전 공사도
모두 일본인에게도 넘어갑니다.

1909년에 완공된 석조전을 보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나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하지만, 고종은 고대 그리스나 근대 미국과 같은
영광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일을 계기로
1907년 황제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이와 함께 경운궁이라는 명칭도 덕수궁으로 변경됩니다.
덕수궁에서 쓸쓸하게 지내던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 그의 죽음을 두고도 일제가 독살했다는 풍문이
널리 돌았습니다.
아무튼 그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3․1운동이 일어났으니
마지막으로 역사에 기여한 셈입니다.
하지만 석조전의 불운은 고종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에 왕실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쓰이던 석조전은, 해방 뒤 다시 역사의 전면에 떠오릅니다.
국내 정치세력이 좌우로 나뉘어 다투는 도중에
국제정세는 냉전으로 치달아 정계가
극도의 혼란으로 빠져듭니다.
이때 미국과 소련의 대표가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여는데, 그 장소가 바로 석조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우다
결렬되고, 결국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으니
석조전은 우리 민족이 천추에 한이 맺힐
비극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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