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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돈의문이 겪은 파란만장한 역사

2014-10-25

지난 여름 서울 동대문 성곽공원에 뜻깊은 박물관이 개관했습니다. 이름 하여 한양도성박물관인데요,
수도 서울을 둘러싼 한양성곽과
여러 성문들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개관 당시 백년 만에 최초로 [돈의문] 현판이 공개돼 관심을 모았습니다.
돈의문, 도대체 어떤 문이기에
형체는 없고 현판만 남은 것일까요.

돈의문은 한양 성곽의 동서남북에 설치된 4대문 가운데 서쪽에 있는 문 즉, 서대문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오늘날 비록 서대문의 형체는 볼 수 없지만, 서대문이라는 명칭에는 익숙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시계를 백 년 전으로 돌린다면,
당시 사람들에게 서대문은 매우 낯선 호칭이었습니다.
그것은 돈의문이 지닌 독특한 이력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흥인지문은 동대문으로,
숭례문은 남대문으로 편하게 불렀습니다.
하지만 돈의문을 서대문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돈의문은 한양 도성을 건축하고
동서남북에 대문을 낼 때 서쪽 대문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위치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오늘날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어디쯤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도성 건축의 설계자였던 태종이
재위 13년에 돌연 이 돈의문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태종의 총애를 받던 한 풍수가가
이 문이 도성의 기를 방해한다고 간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남쪽으로 오늘날의 사직터널이 있는 산,
안산 고갯마루에 새 문을 내고
그것을 서전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도성의 대문이 평지가 아닌
고갯마루에 설치돼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다시 더 남쪽 낮은 곳인
오늘날의 신문로 언덕 위에 새 문을 내고
서전문을 폐쇄했습니다.
이렇게 서대문은 다른 대문들과는 달리
두 번이나 자리를 옮기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문을 서대문이라기보다는
새로 낸 문이라는 뜻에서
신문 혹은 새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이 거리의 이름이 새문안로입니다.
조선시대에 청 나라의 외교 사절이 드나드는 문은
남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돈의문 밖 모화관으로 나가 영접했으므로,
돈의문은 국왕의 행차가 잦은 중요한 대문이었습니다.
동대문과 남대문은 남아 있는데도
국왕이 드나들던 중요한 문이 사라진 것은 왜일까요.
거기에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이
어려 있습니다.
일제는 한양을 개발하면서 전차를 놓게 되는데요,
그 시발점을 마포에 두었습니다.
“밤 깊음 마포 종점”으로 시작되는 유행가에서 말하는
마포 종점은 실제로는 전차 시발점이었던 것이죠.

전차는 마포에서 출발해 돈의문과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까지 운행했습니다.
그런데 1915년에 전차선 복선화 공사를 하면서
돈의문과 동대문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의문은 헐어버렸습니다.
동대문도 헐려고 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그들 나름의 역사적 가치를 생각해서 문을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을 헐어 전차가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일제 당국은 이 돈의문을 서대문이라고 불렀습니다. 돈의문이 여러 번 바뀐 역사적 배경에 무관심했던
그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서대문을 헐었지만 그곳에 만든 전차 정거장 이름도
서대문이라고 지었고, 그 부근에 감옥을 짓고
서대문형무소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은 돈의문이 사라졌어도
서대문이라는 호칭만은 귀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서대문이라는 호칭 자체가
일제 잔재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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