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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과 총통

2014-11-22

지난 11월 8일,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열린
[제4회 세계과학관 심포지엄]에서 우리나라 채연석 교수가 [고려 총통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논문에서 다룬, 대포의 일종인 총통은
‘홍무 18년’이라는 연대가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인 1385년 우왕 통치시기에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문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총통이 정말로 1385년에 제작된 것이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화약무기가 됩니다.
그런데 1998년 문화재청은 이 유물을 감정해서,
진품이 아닌 중국제 모방품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후 유물 소장자와 학계의 재심사 요구에 따라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연달아 재감정을 했으나
결과는 역시 고려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채연석 한국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번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 총통의 내부구조의 여러 특징을 보면
사료에 당시 고려에서 제작한 것으로 나오는
‘이장군포’임이 확실해 보인다면서

관련 전문가들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제대로 평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채 교수의 주장이 옳다면
이 총통은 고려 말에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이
화통도감에서 제작한 무기일 수 있어
그 문화재적 가치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무선은 우리나라 무기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가 나라가 혼란한 가운데서도 화약을 발명했고,
그것이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활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개 고려 말엽 30년은 우리나라에서
왜구가 가장 극심하게 준동한 시기였습니다.
우왕 재위 기간 동안만 해도 왜구 침입 횟수가
378회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당시 최무선은 무기를 제작, 조달하는 관청인 군기시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화약을
자체 개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기울어가는 원과 새로 일어난 명이
서로 대결하며 어수선했습니다.
화약 제조 기술은 어느 나라에서나 군사기밀에 속했지만,
이러한 어수선한 정세는 그것이 느슨해지게 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최무선은 이를 놓치지 않고 원에서 온 이원이라는 상인을
회유해서 그로부터 화약 제조 기술을 전수받습니다.
여러 번에 걸친 시험 끝에 마침내 화약 제조에
성공한 최무선은 조정에 화통도감을 설치할 것을 건의해서
결재를 받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 화통도감에서 화약을 대량 생산하는 한편으로
화약을 이용하는 화기도 개발합니다.
그것 중에는 화전이라는 화약으로 발사하는 화살을 비롯해
다양한 제원의 총통도 있었습니다.
때마침 이러한 신무기를 사용할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1380년 8월, 왜구들이 5백 척의 선박으로
금강 하구 진포라는 곳에 상륙해 약탈을 자행한 것입니다.
당시 기록에는 이때 왜구의 방화와 약탈로
산과 들이 시체로 덮였고, 곡식을 약탈해갔는데,
그때 땅에 떨어진 곡식만도 한 자 두께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심덕부, 최무선에게
백 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해
왜구를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최무선은 육지에서 싸우는 것은 힘들다고 보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적의 선박을 먼저 공격해
퇴로를 차단한 다음 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웁니다.
이때 적선을 공격할 무기는 화약을 장착한 화전과
각종 총통이었습니다.
최무선의 작전대로 공격하자
포구에 함께 묶어두었던 적선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모두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퇴로를 잃은 왜구들은 사기가 저하돼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격퇴되었습니다.
만약 문제가 된 [홍무 18년 명 총통]이 진품이라면
비록 진포 대첩에서 직접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동일한 무기로서 제작된 유물일 것입니다.
엄밀한 재검증을 통해 사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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