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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제 시대의 화장실 문화

2014-11-29

지난 11월 19일은 특별한 기념일이었는데요,
유엔이 정한 ‘세계 화장실의 날‘이었습니다.
올해로 두 번째가 되는 기념일인 이 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전 세계 인구 중 25억 명,
총인구의 3분의 1이 불결한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고,
특히 11억 명은 풀숲 물속 시궁창에서 용변을 해결하고 있다며 이러한 비위생적인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이 날을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실 유적은 언제 적 것일까요.

사실 화장실은 일본식 명칭입니다.
예전엔 변소라고 불렀고, 역사문헌엔 뒷간, 칙간,
정낭 등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러한 화장실은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지만,
실제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백제와 신라 시대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백제 영역인 전북 익산 왕궁리에는 왕궁터가 남아 있습니다. 백제의 수도는 하남위례성, 웅진성, 사비성이었지만
사비성 시대에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를 계획한 바 있으므로
이때 왕궁을 건설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익산 왕궁리 유적 한 귀퉁이에서
깊이 3.4에서 1.5미터 규모의 분뇨 구덩이 3개가
나란히 있는 것이 발굴되었습니다.
각 분뇨 구덩이에는 꼬리 모양의 물길을 내고
그것을 하나로 합쳐 수로로 흘러가게 한 흔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화장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왕궁리 박물관에 그 모형이 재현돼 있는데요,
지금 60대 쯤 되신 분들이 어렸을 때 사용했던 화장실 즉
쭈그려 앉아 일을 보는 전통 화장실과 별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분뇨를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
오늘날 수세식 화장실의 정화조와 비슷한 원리를 적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일본 학자는 이것이 동양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일지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화장실 하면 또 하나 궁금한 것이 있죠.
뒷처리 문제입니다.
우리가 요즘과 같은 화장지를 사용한 것은
사실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바로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풀잎이나 새끼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백제 시대에 종이를 사용했을 리는 없습니다.
당시엔 종이가 너무 귀해서 책을 만들 때도
종이 대신 대나무 조각을 이어붙여서 사용했죠.
이것을 죽간이라고 합니다.
화장실 뒤처리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왕궁리 유적 분뇨 구덩이에서 주목으로 만든
나무 막대 수 십개가 발굴됐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이 밑닦개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목은 표면이 매끄럽고 향이 좋아서
고급 화장실용품이었을 것 같습니다.
왕궁리 유적에 있는 구덩이가 세 개나 됐다면
공중화장실이었을 것입니다.
왕이나 왕족은 별도의 개인 화장실이 있었을 겁니다.
그 유적은 발굴된 적이 없지만,
경주 불국사에서 개인용 변기가 발굴된 바가 있습니다.

사람이 올라앉을 정도 크기의 직육면체의 돌 가운데
타원형으로 홈이 파져 있고,
홈에서 앞쪽으로 구멍이 나 있어
내용물이 물에 씻겨 흐르도록 돼 있습니다.
오늘날의 수세식 변기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은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일이
잦게 마련인데요, 그 중에 소변이 급하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휴대용 변기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60대가 어렸을 때 사용했던 요강과 같은 것인데요. 호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호자의 모양은 호랑이가 앉아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입을 벌린 모양입니다.
여성용도 있는데, 타원형으로 앞쪽은 높고 뒤쪽으로 갈수록
가늘고 낮아지는 모양입니다.
국립부여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모두 전시돼 있는데요, 아마 보신 분들도 이 호자가 요강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친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선진적인 화장실 문화를 발전시켜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요즘 지하철 화장실 등은 유럽 공중화장실보다
훨씬 깨끗하고 위생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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