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 역할

2014-12-13

얼마 전 한 경매회사에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약한 사명대사의 글이 출품돼 고가에 낙찰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매화수하] 즉 “매화나무 아래에서”라는 네 글자로 된 작품이 보관돼 있던 곳은 일본이었습니다.
왜 사명대사의 글이 일본에 있었던 것일까요.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이래 맞은
최대의 국난이었습니다.
이때 관군은 왜군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패주하기에 바빴지만,
지방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그 가운데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등 승병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사명대사는 승병을 이끌고 전투에 참전해서
평양성 탈환작전이 성공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토 기요마사 등 적장과의 담판을 통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에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
총 네차례에 걸쳐 담판을 벌였습니다.
그가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것은 아니지만,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는 조정을 대신해
사실상의 전권대사 역할을 한 것이죠.

당시 왜군 진영은 1군 사령관이 고니시 유키나카
2군 사령관이 가토 기요마사였습니다.
사명대사는 1594년 4월, 울산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 진영을 방문해 첫 담판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때 사명대사는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해 있던
명군 사령관 심유정과 왜군 사이에
비밀리에 강화회담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강화조건이었는데요,
명과 일본이 대동강 혹은 한강을 경계로 조선을 분할하여
그 남쪽을 일본이 차지하기로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945년에 강대국들이 38도선 분할을 결정하기 4백 년 전에
이미 한반도 분할 논의가 있었던 것이죠.
사명대사는 준엄한 태도로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의 태도와 진실성이 가토에게 감동을 주었는지,
당시 일본 측 사료에는 가토가 사명대사를 크게 칭송하고
존경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물러나온 사명대사는 조선 조정에 이를 알려
발 빠르게 대처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조선 조정은 명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한반도 분할안은 없었던 것으로 처리됩니다.
이후 정유재란이 끝나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전후 강화교섭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일본 측은 적극적이었던 반면
조선은 일본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해
소극적으로 임했습니다.
이때 일본의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에게
실권이 넘어가 있었고, 그는 다시 전쟁을 할 수도 있다며
압박해왔습니다.
조선은 일본과 쉽게 화친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일본 국내 정세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습니다.
이때 조정은 사명대사를 활용하기로 합니다.


사명대사가 왜란 때 적정과 여러 차례 담판을 벌였고,
그 과정에 그들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사명대사는 이번에도 조선의 정식 사절단은
아니었으나, 사실상 국왕의 명을 받고 대마도를 거쳐
일본의 수도 교토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강화교섭을 벌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명대사는 도쿠가와가 재침 의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강화를 맺기로 합의합니다.
그러나 합의 조건으로 역 제안을 합니다.
바로 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후 약 3천 명의 조선인이 본국으로 귀환합니다.
이때 사명대사는 교토에 약 4개월 체류하는 동안
본법사라는 절에 묵었는데요,
아마도 이때 [매화수하]라는 글을 쓰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조국을 대표해 담판을 벌이러 온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짐하는 뜻에서 쓴 글씨였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씨는 돈으로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문화재일 것입니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