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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영화계의 개척자, 나운규

2010-10-15

한국 영화 발전의 토대
제 15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난 7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9일간의 영화 향연을 펼치고 있다.
세계적인 거장, 장예모 감독의 신작인 '산사나무 아래'를 비롯해 지구촌 67개국에서 3백 7편의 영화가 출품, 상영되며 국제적 영화 축제의 면모를 또 한번 과시한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은 동시에 한국 영화의 위상을 한 단계, 또 높였다.

부산국제영화제 외에도 한국에서는 유수의 국제영화제가 매년 열리고 있는데, 이렇게 여러 국제영화제가 곳곳에서 개최되게 된 데에는 십 여 년 전부터 급격히 국제적인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 한국 영화의 힘이 배경이 되고 있다.
올해도 한국 영화는 상반기 칸·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이어 하반기에도 9월 초 개막한 베니스국제영화제, 북미 최대 영화제로 불리는 토론토국제영화제, 스페인어권 최대 영화제인 산세바스티안 영화제 등에 속속 이름을 올리며 특유의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더 넓은 세상으로 가지를 뻗어가는 한국 영화의 뿌리는 춘사, 나운규다.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딛고
1902년 10월 1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한 나운규는 신흥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중국 간도의 명동중학에 들어갔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1년여 동안 시베리아를 방랑했다.

그 후 홍범도의 독립군에 들어가 항일전을 전개한 나운규는 이듬해, 일제에 체포돼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23년 출감했는데, 세상에 널리 알려진 ‘춘사(春史)’라는 호는 투옥 중이던 시절, 독립투사인 이춘식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만기 출소 후 고향에 돌아온 나운규는 그 해 겨울,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함흥에서 만들어진 신극단체 <예림회>의 공연을 보고 연기에 매료돼 극단에 가입한 것인데, 땅딸보 몸집에 다리도 휘고, 억센 함경도 사투리까지 사용해 배우로 어울리지 않았던 나운규는 맡을 수 있는 역할도 악역이나 광인, 노역으로 한정됐다.

하지만 부족한 외모를 연기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에 노력을 더한 나운규는 1925년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제작한 <운영전>에 출연! 단역인 가마꾼 역할을 절절하게 그려내며 연기력을 인정받는다.

그렇게 영화와의 인연을 시작한 나운규는 1925년 백남프로덕션의 제1회 작품인 〈심청전 沈淸傳〉에서 ‘심봉사’를 연기하기 위해 시각장애인을 찾아가 장님의 행동을 관찰하는 등 혼신의 연기혼을 펼치며 주연으로 부상했고, <장한몽>, <농중조> 등에 출연하여 조선의 명배우로 불리는데 나운규의 꿈은 더 크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아리랑’의 영웅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 <농중조>에 출연하며 각색과 연출을 경험한 나운규는 1926년, 배우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영화 만들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저항적인 작품! <아리랑>과 <풍운아>의 각본을 직접 쓰고 감독, 주연을 맡아 한국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

특히 1920년대 민중들의 지향과 농촌현실의 모순을 폭로한 <아리랑>은 한국 최초의 비판적 사실주의 영화로 악덕 지주이자 일본의 앞잡이인 오기호가 누이동생을 겁탈하려는 것을 보고 오기호를 살해한 주인공 영진이 끝내 경찰에 붙잡혀 아리랑 고개를 넘는 엔딩 장면에서 관객들은 통곡하며 일제강점기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가슴으로 느꼈다.

그래서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처음 개봉된 <아리랑>은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1년 넘게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됐는데, 이에 힘입어 1927년 자체 프로덕션을 설립한 나운규는 활발하게 영화를 제작하며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했다.


영화같은 일생이 끝나고...
그 후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 등을 만들고, 193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영화계를 1년여 동안 시찰한 나운규는 1932년,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주연으로 출연해 최고의 연기력을 선보였지만, 이 후에 만든 영화는 흥행에 거듭 실패하며 침체기를 겪는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나운규는 혼신의 정열을 기울여 1936년, <아리랑 3편>을 발성영화로 제작하는 도전을 하고, 1937년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는데, 예술적 성공을 위해 오랫동안 무리를 거듭한 탓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된 나운규는 결국 <오몽녀>를 유작으로 1937년 8월 9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이후 한국 정부에서는 민족영화의 선구자인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영화인들은 그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하여 매년 가을, 춘사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영화인으로 활동한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기며 민족의 울분을 영화화하고, 한국 영화의 길을 개척한 나운규.
그가 있어 한국 영화는 깊이를 갖게 됐고, 그 깊이는 세계를 매료시키며 오늘도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한국 영화에 웃고, 한국 영화에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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