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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보 온달, 전장에 나서다

2009-08-22

바보 온달, 전장에 나서다
바보 온달, 평강공주를 만나다.
온달은 한 때 '바보 온달'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던 미천한 존재였지만, 평강공주와 함께 로맨스를 장식하기도 했으며,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10명의 충신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6세기, 제 25대 평원왕이 다스리고 있던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에는 울퉁불퉁 얼굴이 우습게 생기고, 늘 헤진 옷을 입고 다녀 '바보'라 놀림 받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온달이다. 한편 평원왕의 딸인 평강공주는 울보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평원왕은 평강공주가 울 때마다 계속해서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며 겁을 주곤 했다. 이 말을 듣고 자란 평강공주는 16세가 되자 귀족 집안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궁을 나와 온달과 결혼했다. 온달은 평강공주의 도움으로 논밭을 마련하고 무예를 익히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사회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는데, 공주와 평범한 남자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고구려 정세에서 찾을 수 있다.

바보에서 고구려 장수로...
평원왕은 장수왕 이후 계속됐던 왕위 쟁탈전과 귀족 세력 간 갈등이라는 대혼란 속에 즉위한 왕으로 고구려의 전통 귀족 대신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새로운 지지기반으로 삼기 시작했다. 또한 고대 사회에서 신분질서는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낮은 신분이 정계에 진출하기는 쉽지 않다. 온달의 진출도 평원왕의 대외적 위기 속에서 무인들이 활성화 할 수 있는 계기가 열려져 있고, 온달도 무를 통해서 성장한 것이다.

매년 3월 3일 열리는 사냥 대회는 당시 인재 등용의 장으로 온달은 이곳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후주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평원왕 시대에 고구려는 돌궐과 후주 등 여러 나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온달은 후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신진 무장 세력의 대표로 떠오르면서 평원왕에게 사위로 인정받게 되었다.

온달의 업적
서기 587년 평원왕은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를 단행하고, 590년 10월 재위 32년 만에 영양왕에게 왕위를 내주었다. 4세기 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으로 남한강 상류 58성을 차지한 고구려지만 551년에는 신라 거칠부에게 죽령 이부의 10군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후에도 잦은 신라의 침범이 이어졌고, 마침내 온달은 총사령권이 되어 남정군을 이끌게 되었다. 특히 온달은 지금 단양 근처에 있었던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 땅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남달랐다. 고구려와 신라가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교통로로 온달은 죽령의 지리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온달은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아래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온달의 업적은 위대했다. 신라와 고구려의 전쟁 당시 신라는 고구려가 남한강 상류에 진출하면 한강 하류에 있는 신라가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온달은 신라의 주력 부대를 피해 강원도 내륙으로 우회해서 한강 하류에 있는 신라를 공격했다. 고구려의 양동 작전의 결과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가 한강 상류를 상실한 것은 553년으로 연개소문은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 500여리를 빼앗아간 시기를 수의 침입기라고 한다. 수의 1차 침입은 598년에 있었고 2차 침입은 612년부터 연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말은 598년 이전에 누군가가 잃었던 한강유역의 땅을 다시 회복했다는 얘기가 된다. 역사서에는 이 내용이 없지만, 온달전에는 유일하게 온달이 590년 초반에 출정한 기록이 있다. 고토 회복의 염원을 안고 출정했던 온달은 온달산성에서 최후를 맞기 전까지 계립령과 죽령 이서의 무려 500여리 땅을 회복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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