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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기억과 망각의 비밀

2016-05-13

기억과 망각의 비밀
얼마 전 눈길을 끄는 드라마가 하나 있었습니다. 성공한 40대의 변호사가 어느날,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됩니다. 누구보다 말도 잘 하고 누구보다 똑똑하던 그가 점점 지식을 잃고 단어를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변해버리는 이야기이지요. 언젠가부터 우리 주변에는 치매나 알츠하이머와 같은 단어들이 두려움을 동반해 회자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기억과 뇌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치매란 무엇인가?
사실 치매(dementia)란 특정 질환의 명칭이라기보다는 ‘인지기능의 감퇴’와 관련된 다양한 증상들을 모두 일컫는 말입니다. 인지를 담당하는 기관은 뇌이기에, 어떤 이유로든 뇌에 존재하는 신경세포의 파괴 혹은 손상은 치매 현상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현재 치매를 일으키는 원인으로는 약 80가지 이상의 질환이 알려져 있는데, 가장 중요한 3대 원인 질환은 ‘알츠하이머병’, ‘혈관성 치매’, ‘루이체 치매’이며, 이들이 전체 치매 환자의 70~95%를 차지합니다. 그중 알츠하이머병은 가장 흔히 발생되는 치매의 원인으로, 전체 원인의 약 50%를 차지합니다. 기타 질병에 의한 치매로는 ‘픽병’, ‘크로이츠펠트-야콥 병’, ‘헌팅톤 병’, 그리고 ‘후천성 면역 결핍증에 의한 치매’ 등이 있습니다. 또한 알코올성 치매 및 뇌 손상 후의 치매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치매는 회복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드물지만 회복이 가능한 치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뇌에 물이 차는 수두증, 뇌막 아래 피가 고여서 뇌를 압박하는 만성 경막하혈종, 갑상선 기능저하증, 엽산 부족, 종양이 뇌를 누르는 경우, 우울증 증에 의해서도 치매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는 치매 증상을 일으키는 원인을 적절한 시기에 정확하게 파악해 치료하면, 뇌 기능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의 경우, 증상을 늦출 수는 있지만, 원래대로 뇌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은 현재까지는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의 여러 가지 징후들
현재 치매를 일으키는 다양한 원인들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입니다. 이는 1906년 독일의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가 처음 분류하여 보고하였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알츠하이머 박사는 당시에는 희귀했던 신경질환으로 여겨지는 병을 앓다가 사망한 여성 환자를 부검하는 중에, 뇌에 특징적인 현상들이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의 알츠하이머는 노인성 질환이기 때문에 평균 수명이 짧았던 20세기 초에는 흔치 않은 질환이었습다고 합니다. 이 환자의 뇌에는 보통 사람의 뇌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점들이 관찰되었고 신경세포의 섬유들이 이상한 상태로 꼬여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특징적으로 육안으로도 뇌의 전두엽 부분의 뇌세포가 많이 상실되어 있는 것이 관찰되었지요. 따라서 알츠하이머 박사는 전두엽 소실, 노인성 반점, 신경섬유 농축 등의 특징을 나타내는 질병을 일컬어 ‘알츠하이머 병’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는 노인성 치매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질환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전두엽은 기억, 생각, 계획, 판단 등의 인지적 기능을 담당합니다. 따라서 알츠하이머 병이 지속되면 다음과 같은 10가지 징후들이 서서히 나타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조차 상실하게 됩니다.


** 알츠하이머병의 10가지 경고 징후
1) 최근 기억의 상실
2) 계획을 세우고 문제 해결 과정의 어려움
3) 가정과 직장, 여가 시간에 하던 일상적인 일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게 됨
4) 시간과 장소의 혼동
5) 시각적 이미지와 공간 관계에 대한 혼란 - 거울 속 이미지를 타인으로 착각
6) 말하기 또는 쓰기에서 단어 사용의 어려움
7)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지 않음 - 냉장고 속 리모콘
8) 판단력의 감소 및 몸단장 소홀
9) 직장 또는 사회 활동에서 자신을 소외시킴
10) 기분과 성격의 변화-혼동, 의심, 두려움, 불안함 노출



이런 단계를 거쳐 스스로를 잃어가는데, 가장 무서운 것은 역시 기억의 상실입니다. 기억의 상실을 통해 스스로가 누군지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꼭 알츠하이머병이나 치매에 걸리지 않아도 사람들은 무언가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잘 잊습니다. 절대로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일에도 ‘시간이 약’인 경우가 많고,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일도 세월이라는 파도 앞에서는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기억해 두어야만 했던 일들을 잊어버리고는 당황스러워 하는 일은 차라리 일상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

인간이 쉽게 잊는 이유
사실 망각은 생물학적 속성입니다. 우리는 흔히 망각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물리적 속성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래서 기존에 가장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얻었던 망각 모델은 부식 모델과 간섭 모델이었지요. ‘부식 모델(decay model)’이란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이 닳아 없어진다는 이론입니다. 신발을 오래 신으면 구두굽이 닳고, 옷을 오래 입으면 소매깃이 헤지듯이 기억 역시도 시간이라는 마찰력에 마모되어 서서히 사라진다는 이론이죠. 대개의 기억은 처음에는 선명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다는 것이 망각에 대한 부식 모델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망각에 대한 두 번째 설명은 간섭 모델(interference model)입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옷장을 정리하고 낡거나 필요없게 된 옷을 버리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옷장이 그득 차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릴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 뇌의 기억용량에는 한계가 있기에 여러 가지 기억들이 계속 쌓이다보면 이들끼리 자리 다툼을 하다가 그 중 일부가 밀려나 사라진다는 가설입니다. 여러개를 한꺼번에 외우려 하다보면 뒤죽박죽 뒤섞여 하나도 제대로 외울 수 없게 된다던가 잡생각이 끼어들면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기억이 닳아서 없어지든 경쟁하다 밀려나든 간에 기존의 망각 모델은 망각의 과정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수동적 과정이라고 보는 시각이 주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어쩌면 망각이란 생물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과정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생물학에서는 몇 가지 대표 실험 동물들이 있는데, 그 중 C. elegans, 우리말로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선충류도 한가지입니다. 이 C. elegans를 이용해 실험을 하던 중 우연히 과학자들은 MSI-1(무사시-1)이라는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는 돌연변이 선충이 기억력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아니, 벌레를 이용해서 어떻게 기억력 연구를 하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텐데요. 대개 이런 경우는 냄새를 이용합니다. 예를 들면 선충 주변에 좋아하는 냄새, 혹은 싫어하는 냄새가 나는 물질을 놓아두어 위치를 기억하게 한 뒤, 나중에 같은 곳에 놓았을 때 과거를 기억해서 좋은 냄새가 났던 곳으로 움직이는지 혹은 싫은 냄새가 났던 곳을 피하는지를 통해서 기억력을 연구하는데요. 연구자들은 무사시-1 유전자가 고장난 돌연변이 선충들이 보통의 선충들보다 더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물계통상 더 복잡한 생쥐를 이용한 실험에서도 metabolic glutamate receptor 5, mGluR5가 고장난 쥐는 한 번 학습한 내용을 잊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비교 연구를 통해 사람의 DNA 속에도 이들 망각 유전자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유전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망각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일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망각이라는 과정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꼭 필요한 능동적인 과정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우리 신체는 ‘일부러’ 망각이라는 과정을 선택적으로 진화시켰다는 말이 됩니다.

망각의 비밀
언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더 많이 기억하는 것이 무언가를 더 많이 잊는 것보다 생존에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망각의 모순된 비밀을 푸는 열쇠로 등장한 것이 바로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tic syndrome)’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과잉기억증후군이란 말 그대로 일상의 모든 것이 마치 사진을 찍어 순간을 보존하듯 뇌리에 영원히 남아서 기억하는 증상을 뜻합니다. 이 증상은 매우 드문 증상이어서 지금까지 과잉기억증후군으로 공식적으로 판정된 사람은 25명 뿐이죠. 이들의 공통점은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마치 장면 하나하나가 돌에 새겨지듯 머릿속에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과잉기억증후군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2000년 대 초반입니다. 신경의학계의 권위자인 캘리포니아대의 제임스 맥거프 교수는 질 브라이스라는 여성을 진찰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라는 책을 쓰면서 세상에 과잉기억증후군을 알립니다. 브라이스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였습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기억력이 좋다면 살아가는데 유리할 것만 같은데 그녀는 자신의 뛰어난 기억력이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맥거프 교수에게 하소연을 했다고 합니다. 이 여성은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인생 전체를 초 단위로 모두 기억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게 살아가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연히 티비를 보다가 자막에 어떤 날짜가 뜨면 자동적으로 그 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떠오르고, 누군가가 어떤 단어를 얘기하면 그 단어와 연관된 것들이 계속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고 또렷한지라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좋은 기억 뿐 아니라 잊고 싶은 기억까지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터라 매번 과거의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혀 감정 낭비가 심하다는 것이죠. 게다가 그 분노라는 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상대는 전혀 기억조차 못하는 일에 대한 것이라,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었기에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과잉기억증후군을 지닌 사람들은 과거에 사로잡혀 오히려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없는 증상들을 보이곤 합니다.
실제로 의미없는 단어들과 그가 알지 못하는 외국어들을 몇 페이지씩 읽어주어도 그대로 암송해낼 정도로 기억력이 좋아서 ‘미스터 메모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솔로몬 세르셉스키의 경우에는 그 좋은 기억력 때문에 오히려 책 한권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이유는 책을 읽으려고 하면 단어 하나하나마다 연관된 이미지와 기억들이 계속해서 떠올라서 오히려 문장이나 책 전체가 주는 메시지나 의미를 파악하는데는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책 한 줄 읽는데 오만 생각이 다 나니 책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고, 심지어는 누군가랑 대화를 할 때도 상대가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대화 자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그는 이런 증상 때문에 어떤 일도 진득하니 집중할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해 여러번 직업을 바꿨지만 어떤 직장에서도 오래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지만, 반면에 어떤 것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끝까지 해낼 수가 없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그는 서커스단에서 관객들이 질문하는 것을 답하는 쇼를 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지요.
사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망각은, 특히나 아프고 괴로운 기억에 대한 망각은 생존에 도움이 됩니다. 끔찍한 경험을 한 사람이 그 기억을 잊을 수 없다면 그는 남은 일생을 기억의 무게감에 짓눌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어느 정도의 망각은 낙천적 사고방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데 있어서 결정적이라고 합니다. 살아가다보면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일을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 기억을 망각이라는 무기로 무디게 만들기 때문에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래는 과거보다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오늘을 살아내는데 있어 커다란 버팀목이 됩니다. 만약 괴로운 현실에 처해 있는 사람이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미래도 계속 이 기억이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생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가끔씩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들, 절망의 순간에서 생명의 끈을 스스로 놓아버린 이들은 바로 이런 느낌에 사로잡힌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이런 점에서 있어서 망각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형질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망각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죠. 하지만 망각 유전자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가 생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면,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망각에는 우리는 철저히 저항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행동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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