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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새터민 가운데 남한에서 첫 제조업체 사장이 된, 이옥화씨

2011-12-15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에 위치한 'CK정공' 이곳은 정수기나 에어컨에 들어가는 방열판 제조 회사로 각종 부품을 만드느라, 200평 규모의 공장이 매우 분주한 모습인데요.
한쪽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직접 방열판을 만지고 있는 이옥화씨는 함북 회령이 고향인 새터민 출신으로 이 공장의 사장입니다.
새터민들이 주로 냉면집 등 북한음식점 등을 개업하고 있지만 10명의 직원을 둔 제조업체 사장이 된 경우는 이옥화씨가 처음인데요.
그녀는 맨 처음, 이 회사의 경리로 입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옥화 대표) 제가 2006년도 5월14일에 하나원을 졸업해서 나왔는데 처음에는 캄캄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서울 정보 기능 대학(학원)이라고 있어요. 그래서 거기를 제가 처음 다녔는데 저한테 거기 선생님이 회사에 한번 취직을 안해보겠냐 그래서 저한테 사장님을 소개해주셨어요.
제가 지금 방열판 회사 사장님을 그 분을 소개해주셔갖고 8월8일인가 제가 공장에 찾아가서 면접을 봤는데 사장님이 다른 것도 요구를 안하시고 저한테 그냥 우리 회사에 경리가 없으니까 내일부터 나와서 일을 해라, 몇마디 하시고는 저는 취직이 된거에요. 그래서 그때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참 힘들었죠.


맨처음 경리로 취직을 했지만, 입·출금 장부가 뭔지도 모르고 전화 받는 법도 몰랐던 이옥화씨 모르는 건 무조건 물어보고 퇴근 후엔 CAD, 컴퓨터 등 닥치는 대로 배우며 공부했습니다.
또, 생활비를 아껴, 월급의 절반은 적금으로 부어 돈을 모았고 경리일이 익숙해질 즈음에는 현장의 제품 수리부터 제품 홍보일까지 직접 나섰는데요.
그러던 중 2009년, 다니던 회사가 부도 직전에 몰리게 됐고 평소 억척스럽게 일하는 모습을 보아온 사장이 "회사 사정을 가장 잘 아는 네가 한번 맡아보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이옥화씨는 고심 끝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회사를 인수 콘덴싱 킹의 약자 CK정공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했는데요.
본인의 적금을 깨도 자금이 부족해 회사를 살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씨의 열정을 높이 사준 거래처 사람들의 도움으로 힘든 고비를 이겨 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옥화 대표) 사람들과의 믿음이 없었으면 제가 아마 안됐을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시아 선재라고 해서 와이어 철심이 들어오는 데가 있어요.
(거기 사장님한테) “나 이제 설비까지 마쳤는데 원자재가 들어와야 내가 생산을 해서 납품이 돼서 돈이 돌게 아니냐, 사장님도 힘들겠지만 저를 조금만 도와주면 꼭 보답하겠다.” 그분이 외상으로 몇천만원대를 갖다, 몇 달치 물건을 주시는거에요. 그리고 또 다른 데서도 저한테 설비도 맞춰주셨고 공장도 다른 사람한테보다 더 싸게 빌려주시고 원자재도 외상으로 다 갖다 주시고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부도난 회사인데 외상으로 갖다준다는 건 이건 말이 안되는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저한테 외상으로 다 이렇게 주셨기 때문에 저는 오늘과 같은 날이 있지 않았겠나..


뿐만 아니라, 이옥화씨에겐 함께 남한에 온 언니와 여동생이 큰 힘이 되어줬는데요.
세 자매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1996년 두만강을 넘었고 북한에서 받았던 사상 교육 때문에 쉽게 한국행을 택하지 못한 채, 중국 옌볜에서 10여년 동안 식당 등을 전전하며 일했습니다.
그러다 막내 수진씨가 "한번 부딪쳐 보겠다"며 한국으로 떠났고 3년 후, 언니들을 설득해 세 자매 모두 한국 땅을 밟게 됐습니다.

(이옥화 대표) (북한에서) 20년 동안을 남조선은 괴뢰도당이라고 나쁜 교육만 받은 사람이다 보니까 남조선에 간다는 것은 꿈을 안꿨어요. 그런데 어느날, 제 동생이 9년만인가, 동생이 한국간데요. 그리고, 3개월만인가 연락이 왔어요, 저한테 “언니, 나 지금 하나원인데 언니 우리가 TV에서 본 대한민국은 우리가 교육받을 때 남조선 괴뢰도당이라는 게 나쁜 나라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건 세계에서 알아주는 나라고 언니, 우리가 중국에서 신분없이 정말 고통스럽게 피해 다니면서 돈을 벌지 않았냐 그런데 한국에선 우리한테 신분을 준다.” 기에 제가 생각이 딱 바뀌었던거에요.

이처럼 한국에 어렵게 입국해 각자의 길을 걷던 세 자매는 이옥화씨가 회사를 인수한 후 또다시 힘을 모았습니다.
하루 3시간씩 자며 지게차를 운전했고 사람이 비는 라인이 있으면 직접 들어가서 일했는데요.
결국 이런 노력의 결실로, 지금은 회사 빚과 외상도 모두 갚고 월 매출 1억2000만원의 회사로 성장해 관련업체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옥화 대표) 회사를 3군데를 영업을 했는데 두 회사는 영업이 안됐어요. (그중 한) 회사는 저한테 샘플만 요구하시는 거에요. 계속 이렇다 저렇다 얘기도 없이 계속 샘플만 요구하는거에요. 저는 요구하면 요구하는데로 계속 보내줬어요. 그런데 어느날 6개월만인가 저한테 내려오라는거에요. 아, 안되나보다 큰 회사니까 안되나보다 하고 내려갔는데 저를 엄청 공항에서부터 맞이해주셨는데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이 아가씨가 북한에서 와가지고 우리가 그동안 이렇게 많은 걸 요구했지만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이렇게 우리한테 보내줬다. 이 사람한테서 이런 부분들을 빨리 배워야지, 안배우면 당신들은 이 사장님보다도 못하다.” 그렇게 직원분들이 많은데서 저를 자랑을 하시는거에요. 놀랐죠. 정말로 그 자리에서 많이 울었죠. 고맙다고 그때부터 저희가 (그 회사에) 100% 납품을 하고 있거든요.

자신만의 굳은 소신과 노력으로 남쪽에서 희망을 열어가고 있는 새터민 이옥화씨..
언젠가는 대기업에 제품을 많이 납품해 보고 싶다는, 그녀의 꿈은 점점 커지고 있는데요. 여성 CEO로서의 그녀의 활동과 성공적인 남한 정착은 물론 더많은 새터민들의 귀감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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