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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한국에서 공연과 강연 등으로 제2의 삶을 사는 북한 공훈배우1호 출신 주순영씨

2013-06-06

신나는 노래를 흥겹게 부르는, 예술단은 물론 박수를 치는 관람객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공연의 주인공은 탈북 여성 10여명으로 구성된 휘파람 찬양 예술단.
새터민 출신의 주순영씨가 만든 예술단으로 평소에는 각자의 일을 하다가 공연이 있을 때마다 함께 무대에 서는 특별한 예술단입니다.
주순영씨의 설명 들어보시죠.

(주순영씨) 북한에서 배운 게 문화 예술 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혼자서 콘서트를 많이 해왔어요 그동안.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콘서트로 북한 이야기, 문화예술을 통한 북한의 문화를 많은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활동을 하다가 또 예술단 이런 활동같은 것도 사람들이 여러 명이 보여주는 이런 그림도 원해서 제일 최초에 대동강 민족 예술단을 만들었다가 그때는 힘들게 아픔을 겪으면서 포기했다가 3년 전부터 다시 예술단 활동도 공연이 있을 때마다 각자 다 자기 분야에서 일을 하다가 모여서 공연이 있으면 공연하고 5월에는 효도문화 축제, 어르신들 앞에서 봉사공연을 했습니다.

북한에서 미모와 지성을 인정받은 ‘1호 공훈배우’였던 주순영씨는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며 살았던 선택받은 신분이었는데요.
특히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김일성의 첫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 역할을 맡아 당과 북한 주민들에게 국모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주순영) 70년대 초반이었으니까 그때 북한에서 말했던 최초의 기쁨조라고 말할 수 있는 공연단이 우리 호위총국 호위사령부 협주단이었어요. 그 호위총국예술단에서 김일성의 본처, 김정숙의 혁명활동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 음악 무용 대서사극을 만들게 됐습니다. 그때 제가 16살에 데뷔해서 평양에 올라갔고 평양에서 군복을 입은 김정숙 훈련을 받은거죠. 그때 김정숙과 얼굴이 비슷한 사람으로 전국적으로 53명을 뽑았는데 그중에서 3명이 뽑혔고 그 중에서도 1명을 뽑은 거에요. 그래서 공훈배우를 받게됐고...

하지만, 주순영씨의 인생은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김일성 부자의 후광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그녀는 ‘고난의 행군’기에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졸지에 외화벌이에 나서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주순영)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김일성 살아있을 때만 해도 그래도 인민들한테 배급은 못줘도 예술인들한테는 그래도 배급을 줬어요. 그런데 김일성 사망 이후가 북한 사회가 가장 최악이었는데 이미 북한 비상식량이 모두 거덜이나있었어요. 그래서 당간부나 최고 대우를 받던 1호 배우들도 공급받던 돼지고기, 소고기 공급이 끊겼어요. (중략) 그때 많은 무역 대표단들이 해외로 나갔지만 해외 지원을 성사시키지 못했어요. (중략) 남자들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다 도망가고 망명하니까 그래서 그때 당에서 이번에는 여자들을 파견하자. 여자들을 파견하면 누구를 파견하겠는가, 김일성 살아생전 누구보다 정치적 신임과 배려를 많이 받은 주순영 동무가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무역을 그때 잘했어요. 무역을 잘한다는 게 중국에 뭘 들여보내고 그걸 바로바로 식량으로 바꿔오면 잘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던 중 주순영씨는 중국 출장길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는 이유로 체포 위기에 처해, 결국 탈북을 감행했고 도피생활을 하던 중 두차례나 북송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북한을 탈출해야 한다는 일념 아래 결국 몽골과 베트남을 거쳐 2003년 한국 땅을 밟았는데요.
가까스로 건너 온 한국에서의 삶도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북한 음식 식당 3개를 운영하다가 폐쇄를 하는가 하면, 돈을 벌겠다고 장삿속이 뻔한 일에 뛰어들었다가 마음의 상처만 입었습니다.
당시 남한에서의 삶이 버겁게 느껴졌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종교와 공부로 힘든 고비를 넘겼다는데요.
그 이후로는 자신처럼 남한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새터민들을 위해 상담을 하거나 북한 주민들에게 매년 쌀과 우유, 옥수수 등을 보내는 식량지원 사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주순영) 한 3,4년은 정착의 아픔을 겪느라고 집생각을 못했는데 그 다음에 강연 다니고 공연 다니면서 그때 북한 소식을 듣게 된거에요. 여기서는 내가 배고프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면서 북녘사람 선교를 시작한 거에요. 그래서 중국에 우리가 중국 지부를 만들어서 지원해주는 물자가 우유면 우유를 보내고 옷도 보내고 이래서 조선족들이 자동차 싣고가서 북한에가서 나눠주게 해요 2007년부터 하고 있어요.

북한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뒤로 하고 사선을 넘어 한국땅에 어렵게 정착한 새터민 주순영씨.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열정이 더 많은 새터민들의 귀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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