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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한국에서 요리로 제2의 인생을 설계 중인 새터민 대학생, 김하나씨

2013-09-12

재료를 손질하는 능숙한 손놀림 이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념장에 재워놓은 코다리를 올리자 주방에 맛있는 냄새가 가득 퍼집니다.

말린 명태, 코다리를 양념에 재워 굽는 ‘코다리 양념구이’ 요리가 한창인데요.
들어가는 재료와 취향에 따라 양념장을 만드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능숙한 솜씨로 ‘코다리 양념구이’를 만들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 김하나씨는 현재 경기대 외식조리학과에 재학 중인 새터민 대학생입니다.
얼마 전에는 6500여명의 지원자가 참가한 한 TV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가 약 14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본선에 진출, 당당히 TOP 6까지 오르는 실력을 발휘했는데요.
무엇보다 탈북자 출신이라는 편견 없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하는 그녀가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한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김하나) 제가 (아빠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10살때였거든요. 저는 그때 가족들이 다 탈북한 상태였고 저만 북한에 있을 때였는데 아빠가 저를 찾으러 나오셨던 적이 있었어요, 한번 딱 (중략) 그래서 딱 만났는데 아빠가 이것저것 다 사주고 먹을 수 있는 건 다 사줬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제가 너무 굶주렸고 그 상태에서 너무 많이 먹었죠. 그러다보니 장에서는 탈이 난거고 나중에 국경 경비대가 쫓아오는 상황이었는데 저는 뛸 수가 없었고. (중략) 그래서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고 아빠는 저를 들쳐 업고 뛰었는데 결국에는 (저만) 잡힌거에요. 그게 사실 마지막이 된거에요.
그래서 혹시나 내가 이렇게 잘 성장해서 잘 살고 있다는 걸 보면 연락이 오지 않을까, 그런 작은 기대가 있었어요. 그래서 사실 도전을 하게 됐었죠.


10살짜리 아이가 국경 경비대를 따돌리기란 처음부터 역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헤어짐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마음 아파하는 김하나씨.
그래서 그녀가 TV에서 처음 도전했던 요리도 아빠가 가장 좋아하시는 '코다리(명태) 양념구이'였는데요.
북한 특유의 향신료, ‘내기’라는 풀을 넣어 고향의 맛을 시도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김하나) 제가 원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아빠가 어부였고요. 그리고 동해라서 명태가 진짜 많이 잡혀요. 아마 북한 사람들의 90%가 명태를 다 좋아할거에요. 그 정도로 가장 많이 먹는 생선이기도 하고 그리고 명태, 코다리 같은 경우는 아빠가 예전에 바다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올 때면 그 바다에서 끓여먹는게 있어요. 어죽 같은 건데 (아빠가) 그 통에 항상 남겨서 갖다 주셨거든요. 그게 정말 맛있었어요. 그 생각이 났었고 아빠도 명태라는 생선을 정말 좋아하셨거든요. 코다리 종류 그런 기억이 나서 나중에 내가 꼭 만나면 한번 명태 관련된 요리를 꼭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내기라는 약간 향신료 같은 풀인데.. 사실 북한에서.. 국이나 해산물 종류에 주로 많이 사용하고요. 한국은 여러 가지 향신료를 많이 먹잖아요. 그런데 북한은 그렇게 사용하는 향신료가 없어요. 유일하게 쓰는 게 내기라는 건데 깻잎정도? 깻잎 향이랑 굉장히 비슷하고요. (중략) 한국에는 없고 북한에서만 있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이 좀 먹어요. 그쪽에 파는데서 제가 사갖고 왔어요.)


2003년 16세의 나이에 홀로 탈북해 2년 뒤 한국에 입국한 김하나씨는 어린 시절 북한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6살 때 김일성이 사망하며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운 시기가 찾아왔고 이후 부모님과 오빠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각자 중국으로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건데요.
결국 그녀는 10살 때부터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꽃제비’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김하나) 거기서 꽃제비 생활은 아마 13살정도까지 했던 것 같고 빌어먹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소매치기도 해봤고 집도 털어보고 자는 건 밖에서 자는거죠. 겨울에도. 역전 같은데 기차역이나.. 시장통이나 아니면 매점 안에서 저녁에는 문을 닫잖아요. 아는 사람 통해서 매점 안에서 자고 공동묘지 사이 왜냐면 거기는 (묘지가) 촘촘이 있어요. 집근처 야산에 묘지가 많기 때문에 그런 사이에서도 많이 자봤어요.

꽃제비로 어렵게 생활하던 중 김하나씨에게 새로운 희망을 줬던 것이 바로 요리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을 하러 나간 어머니 대신 음식을 만들어야했던 그녀는, 타고난 손맛 덕분에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 팔아,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 먼저 와있었던 엄마와 연락이 닿아 탈북을 시도했고 2005년,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요.
지금도 그 당시 시장에서 팔던 음식들을 종종 떠올리곤 합니다.

(김하나) 제가 거기(북한)서 장사를 한 적이 있거든요. 인조고기를 이용한 인조고기 밥이랑, 두부밥이라고 해서 그게 뭐냐면 여기 유부초밥이랑 모양이 거의 똑같아요. 그런데 거기에 양념장을 얹어서 먹는건데 약간 매콤하게 (중략) 여기 온 탈북자들도 가장 고향생각이 날 때 만들어 먹는 음식이고요.
인조고기라고 있는데 콩에서 기름을 짜고 나머지 대두로 그 찌꺼기를 다시 가공을 해서 약간 좀더 식감이 좋게 만든 게 사실 인조고기고요. 고기대신 나왔다기 보다는 그냥 아무런 식량이 없으니까 대체를 하다 보니.


이처럼 김하나씨에게는 북한에서 홀로 어려웠던 시절을 버티게 하고 헤어진 아버지를 찾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요리입니다.
그리고 낯선 한국 땅에서 정착을 할 때도 요리를 통해 아픈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좀더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우기 위해 현재 대학에서 외식 조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습니다.

(김하나) 저는 나중에 통일이 됐을 때..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혼자서 그런 (꽃제비) 생활을 많이 해봤고 실제로 (북한에 지금도) 꽃제비가 길거리에 많아요.
대부분이 10대고 심지어 학교도 전혀 못 가본 얘들도 많아요. 부모님이 굶어서 돌아가신 경우도 있고 그냥 두고 가버렸다든지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나중에 정말 통일이 됐을 때 그 얘들을 챙길 사람이 있겠냐는 거에요.
(중략) 여기로 말하면 고아원 같은 개념인데 학교인데 집처럼 만들고 싶고 그리고 또 식품 쪽으로 공부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사람이 정말 배가 부르고 영양적으로 잘 섭취가 잘 돼야 정말 다른 생각도 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기초적인,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에서 저는 도움이 되고 싶은거에요. 그게 정말 제가 요리를 하는 이유고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해요. 나중에.


요리를 통해 한국에서 새로운 꿈을 펼치고 있는 김하나씨.
그녀의 열정과 노력이 더욱 빛을 발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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