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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라는 자전 에세이를 출간한 적도 기니 출신의 모니카 마시아스씨

2013-09-26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라는 자전 에세이를 출간한 적도 기니 출신의 모니카 마시아스씨
최근 아프리카 출신의 한 여성이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 라는 한국어로 된 자전 에세이를 출간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책의 저자는 곱슬머리에 까만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 ‘적도 기니’ (Equatorial Guinea) 출신의 모니카 마시아스씨.

(모니카 마시아스) 한국말이 저한테는 모국어죠. 저는 생각도 한국어로 하기 때문에 저한테는 표현도 가장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언어가 한국말이에요. 영어나 스페인어보다도 한국말로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요. 확실히 나는 사고방식이랑 모든게 한국식이다.

그녀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 왔길래,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
모니카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Francisco Macías Nguema‘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1968년 적도 기니가 아프리카 최초로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는데요.
하지만 10여년 뒤, 정정이 불안했던 적도 기니는 내란 직전까지 치닫고 프란시스코 대통령은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사촌 테오도르 오비앙 응게마에 의해 처형됩니다.
평소 김일성 주석과 친분이 두터웠던 프란시스코 대통령은 처형되기 전, 모니카 3남매를 급히 북한으로 피신시켰는데요.
당시 7살이었던 모니카에게 북한은, 무척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모니카 마시아스) (평양) 순안 비행장에 고무풍선들이 많았어요. 고무풍선들이 많이 떠 있었고 사람들이 한복을 입은 여자들, 그리고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중략) 손에 꽃다발을 들고 소리쳤어요, “환영! 환영!”하면서 그 당시 나한테는 고무풍선을 잡고 싶은 그 마음밖에 없었거든요.

‘적도 기니’의 형제국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게 맡겨진 모니카 그의 배려로, 16년 동안 평양에서 생활했는데요. 당시 평양의 거리는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모니카 마시아스) 평양의 밤이 아름다워요. (중략) 제가 살았던 시기가 1979년부터 1994년 까지에요. 그때 당시 평양의 모습은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이제 10년 후에 다시 갔거든요. 진짜 그때는 달랐어요. 슬프고 모든 것이 공간 안에 멈춰있는 도시처럼 하나도 변화가 없었고 10년이 지났는데도 아파트도 겉보기에 낡아보였고 예전에 제가 살았을 때는 안그랬거든요. 그때는 평양의 밤이 아름다웠어요. 밤에 네온등들 다 켜져 있으면 진짜 아름답고 고요한 밤

그녀는 지금까지도 김일성 주석을 제2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요.
모니카는 그가 해준 말과 목소리까지 생생히 기억합니다.

(모니카 마시아스) 잔소리를 좋아해요. 나이든 사람들이 잔소리하잖아요.
공부 많이 해라 품위있는 여자가 되라 등등 그런 잔소리를 많이 했어요.
김일성을 정치인으로 물어보신다면 정치인으로는 저는 반대를 해요. 그러나 김일성을 인간으로서 아버지의 약속을 지켜준 사람으로 생각하면 고마워요.
제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 마지막 약속을 지켜주고 저를 공부시켜주고 밥을 먹여준 사람이에요.


모니카 3남매는 김일성 주석이 파격적으로 지원해준 덕분에 북한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북한 고위층 자녀들만 다니는 만경대 혁명학원에 입학했고 모니카와 언니 마리벨을 위해 이곳에 한시적으로 여학생 과정이 마련될 정도였는데요.
만경대 혁명학원에서 주체사상과 군사교육을 받는 건 물론 밥을 먹을 때도 열을 맞춰야 하는 군대 문화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모니카 마시아스) 이 학교는 원래 북한에서 장교들을 키우는 학원이에요. 여기에서는 오직 남자들만 있는 학교였고 그래서 공부가 끝나면 김일성 군사대학으로 가게 돼있는 학생들이에요. 이제 저랑 저희 언니를 위해서 일부러 여자 반을 만들었어요. 거기서 공부를 시작했거든요. (중략) 이제 고등 중학교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함)에 들어서면서 3,4학년 되면 군사훈련 과목을 끼워요.
그때 군사훈련을 받는건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작전을 배우고 총쏘는 훈련도 해요.


일곱 살 어린 나이부터 북한에 살며 완벽한 북한 말을 구사하고 북한아이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으며 자란 모니카
하지만 의상공부를 위해 진학한 평양 경공대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을 만나면서 북한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만 갔습니다.
모니카에게 외국인 친구들이 들려주는, 평양 밖 세상 이야기는 온통 새로운 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들었던 남한 노래, 가수 조용필의 ‘친구여’는 늘 그녀의 가슴속에 깊게 남아있었다는데요.
이렇게 조금씩 바깥세상을 알게 된 그녀는 결국 23살에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평양에서 배운 대로만 길들여져 왔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니카 마시아스 ) 처음으로 자본주의 세상을 만났을 때 낯설었죠. 내가 밥을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먹어야 하니까 낯설었고 힘들었고 그때도 많이 울었거든요.
마드리드에서 이제 친구들이 생기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면서 (중략) 6.25 전쟁 얘기가 나왔어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남한이 북한을 침략한 걸로 완벽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나보고 아니라고, 반대로 된 거라고 했을 때도 내가 우겼어요. 아니라고 (중략) 그래서 친구들이 저를 데리고 마드리드의 가장 큰 도서관에 데려갔어요. 거기 이제 여러 가지 6.25 전쟁에 관한 책을 쓴 여러 나라 기자들이 있었어요. 저는 일부러 러시아 기자가 쓴 책을 골랐어요. 그런데 보니까 아니에요. 그때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남들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고민도 많이 했고 나를 키워준 사람이 이런 행위를 했다는 게 진짜 가슴이 아팠거든요.


스페인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자 이번에는 북한에서 자본주의 폐해의 온상으로만 알고 있었던 미국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직접 밟은 미국땅 역시 그녀가 북한에서 배웠던 것과는 달랐고 결국 그녀는 또다시 눈으로 보고 자신이 부딪혀 보기 전까지는 그 어떤 말도 확실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데요.
1994년 평양을 떠나 스페인의 사라고사와 마드리드, 그리고 뉴욕 이런 모니카의 긴 여정에, 이제 남은 곳은 북한에서는 갈 수 없었던 나라,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모니카 마시아스) 제가 항상 (한국에) 와야된다고 생각했죠.
왜냐면 제가 자란 땅의 다른 쪽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내가 평양에서 들었던 대한민국은 거기서는 남조선이라고 하죠? 내가 들었던 남조선은 불쌍하고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평양에 있을 때 그래서 그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거든요. 직접 내 눈으로 봐야지 (중략) 그래서 직접
오고 싶었어요.


2007년, 그녀가 직접 경험한 한국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보낸 평양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요.
물건 몇 개라도 더 얹어주려는 시장 아주머니들의 인심도 금세 사귄 서울의 친구들에게서 느끼게 되는 친밀감도 자신이 알고 지내던 평양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했습니다.
이런 한국에서 그녀가 안타까워하는 한 가지!
자신은 서울과 평양의 공통점만 보려고 하는 반면, 사람들은 자신을 통해 두 세계의 차이점만 보려 한다는 점인데요.
그럴수록 통일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말도 잊지 않습니다.

(모니카 마시아스) 서로 헐뜯기만 하면 통일의 길이 멀어지게 되거든요.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북쪽도 그렇고 북쪽은 계속 남쪽을 그때 연평도 폭격사건이었죠? 저는 스페인에서 들었거든요.
저는 그때 사건 보면서 언니랑 같이 봤어요. 뉴스에서 언니랑 들으면서 둘이 똑같이 저건 아니라고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 아니라고 무척 안타까워했어요.


현재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원단을 수입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판매하며, 세계인으로 살고 있는 모니카.
이제는 어디에 있든 간에, 남북 소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는 그녀는 결국 한반도가 있었기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모니카 마시아스) 제가 왜냐면 겉은 까맣고 아프리카 사람이지만 생각하는 거나 정서나 표현하는 걸 보면 한반도 사람이고 한반도라는 게 존재했기에, 내가 살아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고마운거죠 언제나
훗날에 결혼해서 아이를 가진다면 꼭 한반도를 보여주고 싶어요. 평양과 서울
제가 사랑하는 조국이니까 내가 자란 곳이고 고향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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