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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지난 15년간 북한의 장애인과 고아들을 지원해온 민간단체 ‘푸른나무’의 신영순 공동대표

2013-10-03

지난 15년간 북한의 장애인과 고아들을 지원해온 민간단체 ‘푸른나무’의 신영순 공동대표
지난 목요일,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한 사무실.
주말에 북한에 지원될 물자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이곳은 2010년 발족한 대북 지원 단체 ‘푸른 나무’의 사무실인데요 현재 북한에 있는 6살 미만의 아이들을 돌보는 고아원과 장애인 학교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식량과 생필품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푸른 나무의 신영순 공동 대표를 만나보시죠.

(신영순 대표) 2000년부터 정기적으로 북한에 가면서 북한이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많이 당했지 않았습니까? 90년 중반부터 식량난으로 아사자도 많이 생기고 그런 바람에 고아들도 많이 생겨서 그 고아들을 우리가 지금 민족의 자식들을 함께 먹이고 키우는 마음으로 그래서 그 아이들이 통일 세대의 건강한 민족의 일꾼으로 만드는 그런 취지로 고아를 돕고 있고요. 또,이 민족의 가장 소외계층인 장애인들, (중략) 이런 장애인들을 돕는, (중략) 복지의 기초를 세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잇단 대남 위협으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지난 3월, 새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민간단체인 ‘유진벨 재단’이 결핵약을 지원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지난 8월에는 정부가 5개 민간단체의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을 승인, 그 단체 중의 하나인 푸른 나무도 휠체어와 목발, 아동용 의류, 담요 등 9천 여 만원 상당의 물품을 보냈습니다. 신영순 대표는 대북 지원물자들에 대한 모니터링과 겨울을 대비해 아이들을 위한 내복과 연필 등을 지원하기 위해 다음 방북을 앞두고 있었는데요.
재미교포로 비교적 북한 비자 발급이 쉬운 신영순 대표 푸른 나무 활동 이전에도 1998년부터 등대 복지회를 통해 대북지원을 사업을 했던 그녀는 지난 15년간 100번 가까이 북한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신영순 대표) 제가 15년 동안 16년째 되는데.. 거의 100번 가까이 되는 것 같아요.
(중략) 올해만 여섯 번째 들어갑니다.
특별히 7월부터 저희가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고아원하고 장애인 특수학교에 동물 보내기 운동을 시작했는데요. 새끼 돼지, 염소, 토끼, 닭.. 닭 하고 토끼는 한 5달러 정도로 북한에서 살 수 있고, 돼지는 30달러, (중략) 동물을 보내서 이 아이들이 동물을 키우고 (중략) 아이들의 건강, 영양 단백질을 섭취해서 좋고 중략...이번에는 좀 더 지원하려고 합니다.


미국 시애틀에 살고 있는 신영순 대표는 미국 한인 동포들의 후원금을 모아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빵과 콩 우유 공장’도 운영 중인데요.
미국과 서울, 평양을 바쁘게 오가는 그녀가 북한을 돕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던 시아버지, 킨슬러 선교사의 유언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영순 대표 ) 저희 시아버님이 1928년 9월에 24세의 나이로.. (중략) 그때 평양에 (중략) 거지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름도 조선글도 모르고 하니까 아버님이 신학교 평양 신학생들하고 숭실 전
문학교 학생들에게 밤에 와서 야학을 가르치면 장학금을 주겠다 하셔서.. (중략) 학생들이 와서 그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 그런 가족 역사가 있고요. 그래서 1940년에 신사참배 문제로 기독교 학교, 교회들이 문을 닫고 1941년에 아버님이 철수하셨다가 1948년에 다시 한국으로 오셨어요. 북한에는 못가시고 서울에서 70년까지 사역하셨는데
아버님이 좋은 일에 쓰라고 유산의 3분의 1을 좋은 일에 쓰라고 남겨놓으셨어요.(중략) 아버님이 남겨놓으신 유산으로 복지(사업)를 시작했고


시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신영순씨는 1998년 처음으로 북한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방북했는데요. 그녀는 아직도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합니다.

(신영순 대표 ) 사실 제가 처음에 90년 말에 98년도, 북한에 갔을 때 정말 안으면 인형을 안은 것보다 더 (가볍고) 가슴에 그 아이를 안았을 때 정말 너무 작은 아이들이었는데 지금도 그 연령에 비해서 많이 키가 작거나 몸이 왜소한 아이들이 지금 고아원이나, 또 일반 학교에도 많이 있습니다. (중략) 그 아이들을 마음껏 먹이지 못하는 그런 어머니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죠.

그렇게 시작한 고아원 지원이 자리를 잡아가자 그녀에겐 또 다른 소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민간단체 가운데 유일하게 북한의 장애인 돕기에 나선 겁니다.

(신영순 대표 ) 제가 개인적으로 아이가 셋이 있는데.. 아들 둘을 낳고 6년 만에 낳은 막내딸이, 어려서 고열로 정신지체장애인이 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장애인 아이들을 가진 부모들이 겪은 그런 아픔들을 저도 겪었고.. 그래서 제가 남한에서 30여년 동안 장애인 사업을 했습니다.(중략)
북한에 가서 제가 해온 일을 설명하고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정말 필수적인 복지 기초를 놓는 일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장애인 부 분이잖아요. (중략)
그 지원을 하면서 2005년도에 조선장애자 보호연맹 중앙위원회라는 북한의 장애인들을 돕는 기관의 대표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신영순 대표가 북한을 처음 지원할 때만 해도 북한 내 장애인복지는 열악했습니다.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복지 시설은 커녕 목발 등 간단한 보장구마저도 부족한 상황이었는데요
자신의 딸과 같은 북한의 장애인들이 더 이상 차별받지 않도록 그녀는 목발과 휠체어 등을 보내는 것은 물론 지난 2007년엔 장애인들이 직업 재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평양에 보통강 종합편의시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신영순 대표 ) 제가 2007년에 장애인직업 재활 센터를 세웠고 컴퓨터 교실, 봉제, 미용, 이발, 목각, 그런 기술을 가르치는데.. 거기에 출퇴근을 할 수 있게 장애인들에게 세발 자전거같은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휠체어 100대를 지원했고 오토바이 작은 용달, 3발 용달같은 걸 중국에서 12대 지원하고 유럽연합 에서 8대 지원을 해서 그분들이(장애인들이) 운송사업을 하고 (중략)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지원을 하고 상황이 좋아지게끔 하는 것이 민족의 미래를 튼튼하게 하는 통일의 디딤돌을 놓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그녀는 한발 더 나아가 장애인들의 예술과 체육활동도 지원했는데요.
북측의 조선장애인예술단협회를 통해 맹아 악기 연주단과 농아 무용단을 만들었고 조선장애자체육협의의 해외 전지훈련이나 국제대회 참가는 물론 북한이 처음으로 런던 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요.
이런 지원을 통해 북한의 장애인들도 춤과 노래 연주는 물론 스포츠를 통해 자신감과 성취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북한의 고아들이 웃음을 되찾고 장애인들이 조금씩 자신감을 얻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는 신영순 대표.

(신영순 대표 ) 아이들이 이제는 가면요. 미리 신할머니가 온다고 얘기를 하죠. 그러면 제가 이제 문 열고 들어가면 할머니! 하고 아이들이 달려와서 안기고 과자 먹으면 입에다 넣어주면서 “같이 먹자요 같이 잡숫자요” 하면서 그런 순간이 굉장히 감동적이고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부터 제가 시작을 했지만 해마다 변화되고 장애인들의 그 용기와 긍지가 이제는 우리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장애인 예술단도 만들어졌고 장애인 체육 장애인 부모들이나 본인들이 나는 이런 것을 할 수 있다, 라는 인식이 만들어졌고, 자기 스스로들도 높아졌지만 사회 인식도 저희가 작년에 북경으로 전지훈련을 나갈 때 평양 순안 공항에서 많은 분들이 (북의)장애인이 올림픽에도 나가다니, 깜짝 놀랐죠.


‘통일은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 푸른 나무의 슬로건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신영순 대표는 북녘 땅에서 통일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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