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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한국에서 족발 가게를 열고 자립에 성공한 새터민 이영순씨

2013-10-10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 위치한 자그마한 족발 가게. 퇴근 시간이 되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주방에선 밀려드는 주문에 음식을 만드는 손길이 분주하기만 한데요.
요리를 하는 사람은 2004년 한국에 온 새터민 이영순씨 족발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요.
그녀는 10년 전 남한에 온 후 서울 공덕시장 내 소문난 족발집에서 기술을 배웠습니다.

(이영순씨) 우리는 항상 배고프게 살았잖아요. 그래갖고 ‘밥에 고기국 한 그릇 먹으면서 평생에 인간다운 식사를 한번이라도 하고 싶다‘하는 게 북한 사람 소원이거든요. 그래서 “한국 가게 되면 내가 음식 장사를 해야겠다.” 이 생각을 많이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일도 많지만 일단은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 것인가 이것저것 생각했다가 우리는 발족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작은 미니 족발이라고 하고 장족을 우리는 그냥 돼지다리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족발이라고 하더라고요. 이것을 손님들이 와서 먹으면서 족발이 맛있다고 그래서(중략) 아, 나도 이 장사를 해야겠다 한 몇 년을 배워서라도 내가 꼭 성공을 해야겠다, 이 생각을 많이 했어요.

처음엔 어깨 너머로 족발 기술을 배운 이영순씨.
그녀는 고생 끝에 자신만의 비법으로 손님들에게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지난 6월, 꿈에 그리던 가게를 차리게 됐는데요.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영순씨) 많이 힘들었죠. 처음에는사골 우려내고 순대국 끓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족발을 삶고 썰고 하는 것까지 그래도 내가 손님들한테 “이 집 고기 맛있고 이집 족발이 맛있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해 봐야 겠다, ‘노하우를 더해 갖고 남이 안배워준 것도 해보면 괜찮아질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해서 또 다른 집에 가서 다른 사람이 하는 것도 보고 그러다 보니까 그래도 눈에 익고 손에 익고 하다보니까 몇 년 하니까 자신감이 생기고 딴 가게들 다니면서 내 가게 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겠다,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내가 온지 10년 만에 내 가게를 갖고 손님들한테 내 음식을 내놓고 보니까 참 기뻐요.

맛있는 족발을 만들기 위해선 불세기 조절과 삶은 후 적당히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군요.
그녀만의 비법으로 쫄깃한 식감이 살아 있는 족발 덕분에 개업한지 5개월 밖에 안됐지만, 입소문을 타고 단골손님이 하나둘씩 늘고 있는데요.
손님들은 이곳의 족발 맛은 물론 이영순씨의 넉넉한 인심과 열심히 사는 성실함을 제일로 꼽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영순씨는, 자신에게 족발 비법을 배워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새터민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영순씨) 저는 족발하고 순대국 전문이니까 저한테 와서 배워갖고 (가게를) 하는 (새터민) 분들도 괜찮게(여럿) 있어요. 1000 여러 군데 가서 오픈해주고 해보니까.. 수원 쪽에도 그렇고 그 다음에 구로 쪽에도 그렇고 보면 그래도 괜찮게 다 잘하고 있어요.

번화가에 위치하지도 않고 대형 음식점은 아니지만 손님도 늘면서 가게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가끔씩, 탈북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 세월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이영순씨) 제가 오기 전에 앉아서 굶어죽을 수는 없으니까. 가족도 살려야 되고, 제가 집안의 장녀에요. 그래서 우리 동생들도 부모가 없이 자랐어요. 농사일을 해도 먹고 사는데는 부족하고 너무너무 힘들어서 몰래몰래 중국 변방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두만강 건너다니는 그 장사를 강아지 갖고도 다니고 닭 가지고도 다니고 진짜 안 해본일 없이 진짜 눈물도 많이 흘리면서 몇 번 잡혀도 보고 매도 엄청 맞고 잡혀서그래서 한 7년을 두만강 건너다니면서 몰래몰래 다니면서 장사하다보니까 그 다음에는 북한에서 살수가 없었어요.

힘들게 한국에 오긴 했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아온 이영순씨에게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한 사람들도 열에 일곱은 실패한다는 자영업! 가게에 모든 것을 걸고 그녀는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매일 오후 5시부터 이른 새벽까지 정신없이 장사를 하다보면, 몸은 파김치가 될 때가 많은데요.
그럴 때마다 남한에서 만난 남편이 큰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영순씨) 처음에는 이 식당일을 안했어요. (중략) 평택 비닐 공장에서 일하면서 신랑을 그때 알게 됐죠. (중략) 우리 북한 사람들하고도 말이 잘 통하고 잘해주더라고요. ‘저런 사람 만나서 살면 그래도 괜찮겠다, 한국에 적응하는데 빠르겠다’, 그래서 선택했죠. 엄청 자상해요, 우리 신랑이(중략) (내가 한국) 음식도 잘 할 줄 모르니까 “이건 이렇게 하면 맛있고 이건 어떻게 해야 된다” 다 배워주고

현재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혼자 고생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매일같이 가게에 나와, 일을 돕곤 합니다.

(이종영씨 ) (가게에서) 서빙도 하고 시장 물건도 받아다 주고 왔다갔다 하루 종일 보내고 조금 힘들면 뒤에 가서 누웠다가 또 일어나고 내가 몸이라도 건강하면 내 직장을 갖고 반이라도 일해서 도와줬으면
좀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는데 그걸 내가 못하니까 항상 가슴이 아프죠. 그냥 항상 그래요, 마음이그런데 이 사람은 내가 그런 얘길 하면 아니라는거죠.


남편의 미안한 마음과 달리, 이영순씨는 자신의 가게에서 남편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 그 자체라고, 말하는데요 그런 그녀에게 요즘 작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이영순씨) 단골손님을 많이 잡고 앞으로 돈도 많이 벌고 하게 되면 여기(한국)도 어려운 사람이 많고 하니까 좀 도와주고 싶어요.
신랑하고 같이 남한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 북한 사람만 불쌍한게 아니잖아요. 많이 도와주고 싶어요.


새로운 터에서 삶을 시작하는 사람이란 의미의 새터민!
아침마다 남편과 함께 가게 문을 열고 단골손님을 맞는 이영순씨! 자신의 힘들었던 처지를 기억하며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도 돌아볼 줄 아는 그녀의 새로운 터전이 더욱 단단하게 다져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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