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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한국에서 세 아들과 함께 금빛 메달을 꿈꾸는, 전 북한 유도 국가대표 출신 이창수씨

2013-10-17

한국에서 세 아들과 함께 금빛 메달을 꿈꾸는, 전 북한 유도 국가대표 출신 이창수씨
경기도 안양의 한 가정집.
TV 앞에 앉아 얼마 전 중국 전지훈련에서 돌아온 막내아들의 유도 동작 하나하나를 예리하게 분석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
그는 1989년 유고 유도 세계 선수권 대회 동메달리스트이자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로 북한의 유도 대표선수였던 이창수씨입니다.

(이창수씨) (북한에서) 8년 동안 (유도대회에서) 1등 했어요. 8년 동안 져보지 않고 1등 했지요. 그래서 뭐 거기(북한에) 있는 동안 나가면 1등이니까 ....., ......(중략)....그러니까 뭐 있는 동안은 (대우를) 잘 받았죠.

이창수씨는 10살 때부터 유도를 시작했는데요. 16살 평양시 체육단에 들어간 후 재능을 인정받아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됐습니다.

(이창수씨) 열여섯에 학교졸업해서 평양시 체육단이라고 실업팀이죠. 운동하려고 처음에 실업 팀에 갔는데, 운동은 못하고 계속 동원만 나간 거예요. 건설현장에 (중략) (그러다가) 84년도에 2월에 김정일 생일 맞아서, 백두산에서 경기를 했어요.
그때 열여덟 살이었죠. (중략) 그래서 참가하고 싶으면 손들라고 해서, 벌떡 일어나서 손을 들었죠. (중략) 나가자마자 1등을 했어요. .....(중략) 그때부터 국제대회 나가기 시작했죠.


이후 1989년 세계유도선수권 대회에서 통쾌한 한판승으로 동메달을 딴, 이창수씨!
북한에 돌아온 그는 공훈훈장까지 받으며 유도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는 갈비뼈 부상을 입고도 은메달을 땄는데요
그러나 메달의 기쁨도 잠시 북한에 돌아간 그는 한국 선수와의 경기에서 패했다는 이유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습니다.

(이창수씨) 우리 평양팀이 천명이 넘어. 그 앞에서 비판해야 해.
은메달 따고 왔다고 (자아)비판해야 되고. 그 비판하고 내려왔더니 차를 타라해서 바로 탄광으로 가대요. (중략) 670m 갱으로 들어가요. (중략)670m를 들어 가는데 계단이 없어요. (중략)
장단지까지 석탄물이야. 점심도 거기서, 안에서 먹어야 돼요.


비록 하루에 불과한 탄광노동이었지만 그가 느낀 수치심은 조국에 대한 배신감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듬해 1991년 바르셀로나 세계선수권 대회 참가 후 이창수씨는 한국으로 귀순을 결심합니다.

(이창수씨) 북한은 선수들이 외국 나갈 적에 갈 때는 비행기로 가요. 근데 올때는 비행기 값이 없어요. 그래서 기차 타고 올 때가 많아요. 그래서 스페인에서 시합을 끝나고, 파리에서 모스크바 가는 기차타고 가기로 했어요
열차 시간표를 보고선 계산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내가 도망쳐) 뛸 자리는 독일이다 생각을 했죠.
그래놓고(중략) 기차에서 내려서 나가려고 하는데 뒤를 딱 잡더라고요. 누가. 섬찟했어요. 진짜 머리카락이 이만큼 섰어요. 그래서 봤더니 열차 승무원인 거에요. 아, 열차 출발 하니까 빨리 타래요. 알았다 그러고. (중략) 막 출발해 가는데, 열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니까 승무원이 가더라구요. 그래서 순간 문을 다시 열었죠. 이거 넘으면 자유고, 이거 끌려가면 난 죽는다 생각을 했죠. 뛰자 그래서, 그대로 뛰었죠


1991년 자유를 찾아 한국에 온 이창수씨는 대만 출신 유도 여자 국가대표인 진영수(첸링젠)씨와 결혼해, 단란한 가정도 꾸렸습니다.
결혼 후에는 한국 마사회 코치이자, 세 아들의 아버지로, 열심히 생활했는데요.
그러나 화려한 조명 속에 시작한 남한 생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 사기도 당하고 북한에 있던 형이 벌목소에 끌려가 일하다가 죽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해 마시기 시작한 술은 간경화까지 불러 왔습니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그 시절, 유도가 또 한번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2008년 여름, 둘째 아들이 유도를 배우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창수씨) 나는 몰랐었어요. 근데 아들놈이 유도를 다녔더라고요. 나 몰래. 뭐 처음에 유도 얘기 할 때 “힘들게 뭐하러 해, 하지 마. 나야 북한에서 힘드니까 이거 해서 먹고 살겠다고 유도 했지.” 그래서 유도를 안 시키려고 그랬었죠. 근데 제 발로 술술 잘 찾아갔네요. 그래서 아들보고 물어봤죠. ‘너 정말 유도할래?’ 유도 하겠다는 거에요. 좋다. 이제부터 아빠가 가르친다. 그래서 그때부터 내가 가르쳤어요.

둘째 아들이 유도부가 있는 중학교로 전학하자, 태권도를 하던 맏형과 막내도 함께 유도를 하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이창수씨는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느는 3형제를 보며 삶의 재미를 느꼈습니다.

(이창수씨) 둘째 가르쳐서, 2년 만에 전국체전 1등했어요. 그때. 전국체전에서 1등하고 하니까 막내, 자기도 한대요. 그래서 너도 해라 좀 지나니까 또 첫째도 한 대.
첫째가 지금 용인대학교, 2학년이고. 공부하러 대만 나가있고. 둘째가 국가대표 상비군이고, 셋째가 청소년 국가대표고 뿌듯하죠.


삼형제에게도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막내 이위진) 아빠는 그냥 남들이 모르는 뛰어난 기술을 갖고 계셔서, 그냥 안 풀리는 게 있으면, 아빠한테 물어보면 아빠가 다 답을 찾아주고요.

아이들을 유도 국가대표로 키워 자신이 못 이룬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이창수씨! 그 꿈을 향해 노력하는 하루하루가 그는 행복합니다.

(이창수씨) 내가 운동할 적에는 올림픽을 참가를 못했어요. 세계 선수권 대회만 참가한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하루 빨리 세계 1등하고 올림픽 금메달 따라고. 지금 바라고 있고. 할거라고 믿어요.
나는 그래요. 지금 살아가는 데 제일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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