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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11살의 유서’를 펴낸 새터민 김은주씨

2013-11-07

친구들과 중간고사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서강대 4학년 졸업반, 김은주씨 언뜻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이지만 그녀는 2006년 한국에 온 새터민으로 최근 자신의 탈북 과정을 쓴 ‘11살의 유서’의 주인공입니다.
이 책은 국내보다 프랑스와 노르웨이에서 먼저 출간돼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요.
평소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의 세바스티앙 팔레티 서울 특파원이 은주씨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고 제안한 겁니다.

세바스티앙 팔레티(Sebastian Faletti) 북한 관련 대부분의 책들이 대부분 정치나 정권을 다루고 있는 반면, 주민들의 실태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책은 많지 않다. 그래서 북한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는 유럽 독자들에게 북한 주민들, 특히 젊은 세대의 입을 통해 북한 실상을 알리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대학생 김은주씨의 얘기를 쓰기로 했다.

지난해 3월 프랑스에서 ‘북한 지옥탈출 9년’ (COREE DU NORD 9 ANS POUR FUIR L'ENFER)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에는 북한에서의 굶주림은 물론 생존과 자유를 향한 9년간의 눈물겨운 탈북과정이 담겨 있는데요. 그녀가 지옥과도 같았다고 표현한, 지난 9년의 탈북과정을 다시 한국어로 출간한 이유는 뭘까요?

(김은주씨) (내가 겪었던 일들이) 과거에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북한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략..(북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탈북자들이 침묵한다면 누가 이 얘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어떻게 보면 저는 이런걸 알리는 게 탈북자들의 의무라고 생각을 해요.

함경북도 은덕에서 태어난 은주씨는 11살 때인 1997년, 고난의 행군 시절 극심한 식량난 속에서 늑막염과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아버지를 잃었는데요.
당시 은주씨와 언니, 그리고 어머니, 세 모녀에게는 목숨을 유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였습니다.

(김은주씨) 저희가 정말 다른 걸 바란게 없었던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정말 오직 먹는 거, 오늘 이 한끼 먹으면 다음 한끼는 뭘 먹을까? 정말 그 생각밖에 할 수 없었거든요. 모든 활동이 결국 먹을 걸 찾는 것 밖에 없고 그렇게 지냈었죠.

그러던 어느날, 은주씨 어머니는 중국인이 많이 드나들던 나진·선봉 지역에 가서 음식을 구해 오겠다며 언니를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텅 빈 집안에는 11살의 야윈 은주씨만 홀로 남았는데요.
하루, 이틀, 사흘 식량을 구하러 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굶주림에 지친 은주씨는 의식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어린 은주씨는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 그리고 그리움을 담은 유서를 썼습니다.

‘나는 은덕의 작고 추운 아파트에서 일주일이 다 되도록 혼자서 지내고 있었다. 부모님은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세간이란 세간은 모조리 팔아 버렸고 ,남아 있는 것이라곤 밥상과 농짝 하나가 전부였다. 전기도 끊겼다.
엄마는 떠나면서 이삼일 안에 먹을 것을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날은 저물고 어둠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불을 지펴 방을 덥힌 지 오래 되었는데도 추위를 느낄 기력조차 없었다.
쌀 한 톨 입에 넣지 못한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굶어 죽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유서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열한 살이었다.‘


다행이 엿새 만에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와 언니. 하지만 이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습니다.
집에 남은 마지막 세간이었던 장롱까지 땔감으로 쪼개 팔고 들판을 헤매며 쌀과 옥수수를 훔쳐, 모진 목숨을 연명했지만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자 결국 세 모녀는 생존을 위해 탈북을 결심합니다.

(김은주씨) 그때 당시는 (북한에) 불만을 가질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어요. 우리 가 못사는 것은 남조선 간첩때문이고 미국놈들이 우리의 식량을 가져오는 배를 가라앉혀서 그렇게 된거라고 들었거든요. 그리고 항상 위대하고 아버지 같고 하는 사람에게 쉽게 의문을 품을 수 없었거든요. 세뇌가 됐기 때문에(중략) 탈북이라는 것이 누구는 그 용기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삶의 마지막 길이어서 어떻게 보면 떠밀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999년 두 번의 시도 끝에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중국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은주씨는 회상합니다.

(김은주씨) 중국에 무사히 도착했는데 정말 인심 좋아보이는 어떤 여자분을 만났어요. 그분이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고 우리가 거기서 며칠 묵었던 거에요. 그러면서 그분이 설득을 하더라고요.
(중략) 중국에서 안전하게 살려면 중국 사람한테 시집가는거다 그리고 중국사람들은 돈이 있으니까 아이들 학교도 보내주고 잘되게 해줄거다 엄마도 (중략) 동의를 했는데 정작 그(중국인 의붓아버지) 집에 가니까 상황이 그렇지 않은거에요. 그래서 한 1년 있다가 우리가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그러더라고요. “나는 너희를 2천위안 주고 샀으니까 그걸 내고 가라”고 그때 ‘아, 우리가 인신매매한테 팔렸던거구나 그 선량하던 여자도 결국은 그런거였구나’ 깨달은거죠.


은주씨는 의붓아버지와 함께 산 3년 동안 배고픔은 해결됐지만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게다가 언제 잡혀 갈지 모르는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중국 공안의 단속을 피해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2002년 마을 주민의 밀고로 세 모녀는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됩니다.
하지만 청진에서 극적으로 또다시 탈북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같은 해, 재 탈북에 성공한 은주씨 가족은 중국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2006년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1997년 겨울, 탈북을 시도한지 9년만의 일입니다.

비행기는 요란하게 떨리면서 착륙했다. 기장이 가래 끓는 소리로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방송을 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가 정말로 해냈다는 기쁨과 ,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뚝 떨어졌다는 두려움으로 내 마음은 어지러웠다.

오직 살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티며 어렵게 밟은 한국 땅!
남한은 그에게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선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바로 누구나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 그것입니다.

(김은주씨) 한국에 와서 제일 좋은 것은 내가 한 것만큼 내가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꿈을 갖고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면 얻을 수 있다 그게 제일 큰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그게 없었고 중국에서도 제 신분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거든요.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을 누리고 있지만 아직도 은주씨의 마음 한 구석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그 곳에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떠올리면 마음이 아파오는 한 사람 한사람 갓난아기 먹일 젖이 없어 물만 들이키다 끝끝내 아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며 통곡하던 아랫집 아주머니

바라고 바라던 대한민국에 오지 못하고 몽골 땅에 묻혀버린 그 아저씨

소똥에서 옥수수 알을 찾아내어 누가 볼새라 입속으로 집어넣던 그 아이

갈 곳이 없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다리 밑을 헤매는 나진.
선봉의 꽃제비들

묘비도 없이 지내던 아빠는 저 세상에서 묘소 한번 찾아오지
못하는 우리를 원망하시지는 않는지.

북한에도 고통이 없는 그날이 꼭 오겠지.

서울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타는 그날을 꿈꾸며


그의 증언이 북한 사람들의 힘든 현실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만 있다면 책을 쓴 보람은 충분할 것 같다는 김은주씨!
그는 이방인도 아닌 탈북인도 아닌 우리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꿈많은 평범한 여대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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