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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트로트가수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최금실

2018-01-04

트로트가수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최금실
<내 사랑 당신>을 부르며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최금실씨는 북한이탈주민입니다.

저는 노래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하고 이 세상에 그 전부를 얻은 듯한 그런 행복감에 저는 도취되어 있답니다. 사실 저는 사람들이 많고 엄청 많잖아요. 그럼 하나도 안 떨려요. 그런데 오히려 무대가 좁고 사람들하고, 여기 사람들이 적잖아요? 그럼 왜 그런지 어
수선한 게 긴장되더라고요.


최금실씨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고, 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교 졸업 후 군선전대와 황해남도 도선전대에서 10년 넘게 활동했습니다

북한에서 사실 저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는 바이올린도 치고 노래도 했는데 바이올린을 켜는것보다는 노래하는 것이 더 좋았어요. 무대 위에서 막 많은 관객들 속에서 박수갈채 받으면서 하는 게 너무 좋아가지고 북한에서도 오디션을 봐가지고 군부대 선전대 사회안전부 협주단 거기 가서 성악 가수로 활동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노래도 하고 mc도 보고 그래서 전문 노래를 많이 했어요. 사실 제가 자유가 그리워서 탈북한 것도 있고요. 정말 대한민국에 가서 정말 제 이름으로 된 앨범을 내서 꼭 성공하고 싶어서 사실 간절하게 그 노래에 대한 열망이 간절해서 탈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최금실씨가 한국에 온 것은 지난 2008입니다. 정착 초기에는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해서 직업세무회계 전문학교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백화점과 식당 등 다양한 곳에서도 일을 했는데요. 무대에 대한 아쉬움은 떨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실 여기 남한에 와서 공연 많이 하고 싶고 가수 활동 하고 싶은데 처음에 설 무대가 없잖아요. 그래서 경로당이라든가 고아원이라든가 어르신들이 계시는 복지관 먼저 찾아다니며 노래를 하고 그 다음에 제가 북한에서 가수 홀동한 그 약령을 보고 경찰의 날에 초대가수로 노래를 하고 그 다음부터 점점 섭외가 들어오더라구요 어느 날 우리 강북구에 kbs전국노래자랑의 어떤 무대가 여기 한 대요. 경쟁자들이 어마어마했어요. 막 새벽 2시, 3시까지 했는데 거기서 15팀이 뽑혔는데 거기에 제가 한 팀으로 뽑혔어요. 와 잠이 안 오고 완전히 제가 막 그냥 성공한 거 같고 스타가 된 거 같더라고요. 본선을 했는데 본선에서 제가 최우수상의 영예를 받았어요. 우리 고향 ##댁 상 탔네, 하고 송해 선생님 멘트가 딱 나오는 거예요. 눈 감았다 딱 뜨면서 막 눈물이 주르륵 나와서 그 때 감격 말하라고 하면요. 제가 가장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마도 그 때 그 순간이었던 거 같아요. 그래
서 저의 가수 활동은 이렇게 시작됐고요.


최금실씨는 복음성가 위주의 1집 앨범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요, 무대에서 좀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나기 위해서 이번엔 트로트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트로트는 북한에서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장르라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이럴 적부터 해온 발성과 창법을 바꾼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성악가 같은 거, 씩씩한 노래, 당을 선동하는 노래, 경제 선동 이런 노래만 했고 주로 뭐 ‘백두의 정기는 넘치고 우리 손으로 세상을 꾸린다.’ 뭐 이런 노래 ‘동무여 나가자~ 혁신의 불길이~ 타~오른다~’ 뭐 이런 노래 막 했죠. 그런데 남한에 오니까 신사동 그 사람은 ‘그 사람 오지 않고 나를 울리네~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는데~ 아아~ 내 마음 가져간 사람~ 신사동 그 사람~’ 이것을 제가 맛을 못 내겠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래서 너무 속상했어요. 저도. 그래서 일단은 많이 들었어요. 유튜브로 막 이어폰 끼고. 그 다음에 계속 불렀어요. 공연 가서 제가 혼자서 부르고 제가 혼자서 연습하고 막 불렀어요. 짬만 있으면 노래, 화장실 가서 노래, 계속 했어요. 그 다음 앨범 이제 내면서 남국인 선생님께서 신사동 그 사람을 작곡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 선생님한테 주현미 선배님의 노래 창법이나 이런 걸 더 제가 계속 많이 듣고 연습하고 지금도 계속 연구하고 계속 연습하고 있어요. 그
선배님처럼 정말 제가 그 이상으로는 못 해도 선배님만큼은 잘할 수 있도록 제가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오랜 준비와 노력 끝에 마침내 <남자의 바람>을 타이틀 곡으로 하는 최금실씨의 두 번째 앨범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최금실씨는 그 앨범이 나오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고 합니다. 최금실씨와 트로트 앨범제작과정을 지켜 본 어머니 강선옥씨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보시죠

① 와 저는요. 만세 불렀어요. 저 혼자 북한산에 올라갔어요. 와! 최금실이 너는 대박이다!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대한민국의 국민 스타로 거듭날 것이야! 하고 막 소리 외쳤어요. 그래서 그 때 제가 막 온 하루 그냥 소리 막 지르고 하다 보니까 막 속이 그냥 가슴이 뻥
뚫린 듯한 그런 느낌? 너무 좋았어요. 진짜 행복했어요. 진짜로.
② 사람들도 많이 팬들도 좋아하고 하니까 제 기분도 정말 제가 하는 기분처럼 그렇게 좋습니다. 지나간 그 고생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여기가 또 고향이고, 또 앞으로도 딸이 이제 성공해서 꼭 그 노래가 뜨길 기대하면서 언제든지 응원합니다.


그렇게 원하던 앨범도 나왔고, 이제는 제법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은데다 출연요청도 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꿈꾸던 모든 것을 이뤄가고 있는데요, 그렇지만 탈북과정에서 헤어진 아버지생각에 최금실씨 마음 한 구석은 늘 불편합니다.

저는 이렇게 기쁜 순간들, 그리고 이 행복한 순간들을 저희 아빠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아빠가 늠름해하고 대견해하시고 얼마나 사랑해주셨을까, 그래서 저는 항상 기쁜 순간, 행복한 순간들이 올 때마다 아버님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사실 아버님께서 그 때 탈북을 함께
못 하셨어요. 그 때 탈북 당시에 아버님께서 다리가 안 좋으셔가지고 함께 가다가는 아버님께서내가 너희 탈북하는데 짐이 되실 거 같다고 하시면서 정말 그렇게 생이별을 했어요. 항상 그 기억이 생생해요. 그래서 가장 제가 맛있는 거 먹을 때 저희 아빠가 찰떡하고 돼지고기를 엄청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찰떡 먹을 때 하고 돼지고기 먹을 때 하고 그 다음에 가장 기쁜 일들이, 좋은 일들이 있을 때는 항상 아버님이 그리워서 그 좋은 순간들을 아버님께 항상 아뢰고 제가 그 순간들을 만끽해요. 그래서 아버님이 많이 그리워요. 저는 사실.그래서 이곡, 내 가슴의 기도라는 곡은요. 제가 작사를 했는데요. 하루빨리 북한에 있는 그리운 부모, 처자들 을 위해서 통일이 되게 해달라고 가슴으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 노래하는


최금실씨는 그리운 아버지와 함께 남북이 함께 하는 통일콘서트 무대에서 자신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는 행복한 상상을 하곤 하는데요. 최금실씨는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 계획이 있다면 우리 대한국민, 남녀노소가 다 좋아하는 그런 노래를 만들어서 대한민국의 국민 스타 가수가 되고 싶은게 저의 최상 목표이고, 또한 작년에 남북사랑 나눔 복지회라는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탈북민 자녀들에게 대학 장학금도 드리고 싶고 우리 3만명의 탈북민들에게 정말 크나큰 사랑과 그리고 희망, 또 꿈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공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가수로서의 성공을 통해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착을 돕고, 남북이 통일 됐을 때, 그 기쁨을 마음껏 노래하기를 바라는 최금실씨의 소망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오늘 <목요진단 한반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나운서 임수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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