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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북한 학생들에게 기술 가르칠 날 꿈꾸는 최광일

2018-01-25

북한 학생들에게 기술 가르칠 날 꿈꾸는 최광일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들> 오늘의 주인공은 인천환경공단 청라사업소 최광일주임입니다.

저는 인천환경공단 청라사업소에서 폐기물소각장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요. 폐기물 보일러를 운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천 시내의 폐기물을 우리 소각장에서 소각을 해서 그 보일러에서 소각한 열로 스팀을 생산해서 충남 지역 주민들이 난방이라던가, 또 여름철에는 전력을 생산해서 한전에 판매를 하는 그런 일을 하는 인천시 지방공기업에서 지금 일을 하
고 있습니다.


고향이 청진인 최광일씨는 17살에 입대해서 10년간 군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대 후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집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상황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상황이었던 거죠. 최광일씨는 고민 끝에 중국 국경에 있는 친척을 찾아가 잠시 일을 하다가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가 2011년, 열 아홉 살이었습니다.

한국에 오니까 너무 많은 정보에, 너무 많은 사람에... 너무 있으니까 한동안 정말 어디가 어디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거예요. 들리는 소문에 노가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그래서 제가 건설현장에서 처음엔 일을 했었거든요. 철거, 인테리어를 하는 업체에서 철거하는 작업을 제가 했어요. 군대 때 워낙 일을 경험하다 보니까 별로 힘들진 않았어요. 돈도 많이 벌었었고... 그러면서 정말 전국을,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어요. 부산, 목포, 울산, 진도, 전국 건설업체, 건설현장 다 돌아다니며 일을 했는데 그때 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좀 많이 알았던 거 같아요. 정말 기술이 발전된 나라고, 정말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나라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죠.

건설현장에서 만난 선배들의 조언이 최광일씨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사업에 실패했거나 퇴직 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 건설현장을 찾은 이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술이 없어서 아쉽다'는 얘기를 많이 한 겁니다. 그러면서 최광일씨에게도 젊었을 때 기술을 배워서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을 했던 거죠. 최광일씨는 수소문 끝에 무작정 기술교육을 중점으로 하는 대학을 찾아갔습니다.

학생처 분이 무슨 기술을 배우고 싶냐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무슨 기술을 배우고 싶은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기술만 배우면 된다, 하니까 그 학생처 분이 참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참 다양한 기술이 있다, 전기도 있고, 기계도 있고, 설계도 있고, 자동차도있고, 있는데 여기서 본인이 선택을 해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폴리텍대학교에 15개 학과가 있었는데 그 학과 교수님을 그 날 다 만났어요. 그래서 내린 게 컴퓨터응용기계설계과. 그런데 저는 사실 컴퓨터를 한국에 와서 처음 만져봤어요. 영어도 하나원에서 ABCD를 배웠고. 그런데 한 교수님이 되게 따뜻하게 대해주셨어요. 다른 교수님 다 따뜻하게 대해주셨는데 그 교수님이 특히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커피도 타주시고 간식도 꺼내놓으시고...정말 잘 왔다고 여기 열심히 하면 잘살 수 있고 너도 할 수 있다 막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그 때 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뭘 배워주는지 모르지만 그 교수님 학과로 가야 되겠다, 해가지고 선택한 게 컴퓨터응용기계설계학과에 들어갔는데...

문제는 입학이후 였습니다. 난생 처음 접하는 컴퓨터와 영어. 수업시간은 외계에 뚝 떨어진 듯, 괴로웠습니다. 열흘간 현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하루 수업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건설현장에선 당장 큰 돈을 벌 수도 있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는 공부를 하다니, 이게 왠 고생인가 싶었습니다.

남산까지 학교에서 걸어갔어요. 한 2시간을 걸어갔어요. 탈북할 때 생각, 여기 하나원 있을 때 생각, 현장에서 일하던 생각...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그 때 내가 왜 배우려고 했는지에 대한 그 생각을 그 때 다시 돌이켜 봤던 거 같아요. 그리고 나는 북한에서 살았고 군대에서 있었으니까 항상 나는 뭔가의 지시나 명령에 복종하고 거기에 움직이고, 지시나 명령을 내리면 항상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한번 해 보고 싶다고 결심했던 게 공부였는데 지금 안 하면 너무 후회할 것 같은 거예요. 오늘하고 그만 둘 수도 있지만 내가 한번 한 학기만 버텨보자, 정말 나중에 한 40살, 50살 됐을 때 지금 포기, 1학기만 마치고 포기했어도 그 때 가서 후회하지 않게 한 번 내가 있는 힘껏,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 해보자,

다시 한 번 해보자고 결심을 한 최광일씨. 이해가 될 때까지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반복해서 교과서를 읽었습니다. 그래도 안되면 어린 동기생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교수님들을 쫒아다니면서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한기동안 열심히 공부했지만 시험기간이 되자 걱정이 앞섰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김밥 사서 먹고 거기서 자다가 화장실에 가서 이렇게 아침에 세면하고 또 시험 보고 또 시험 끝나면 다음 과목 시험을 준비하느라고 또 이렇게 하고... 정말 2주를 집에 안 가고 도서관... 그러니까 한 보름을 옷을 갈아 못 입었어요. 나는 여기서 점수가 안 나오거나 이러면 미련 없이 포기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근데 시험 발표를 딱 받아 보니까 중간에서 조금 낮은 점수인 거예요. 그 다음에는 뭔가 오? 뭐야?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래도 열심히 안 한 거 같은데 60점 받았으면 오 이거 잘 받은 거네? 다음 학기에는 조금 더 잘 하면 한 50등에 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조금 자신감이 생겼던 거 같아요.

처음엔 힘들었지만 일단 방법을 터득하자 공부는 생각보다 수월했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 할 수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치열한 공부에 자격증취득까지, 최광일씨의 학창시절은 하루하루가 귀한 경험이었는데요. 특히 국토순례는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 됐다고 합니다. 물론 그전에도 전국의 건설현장을 쫒아다니며 일을 했지만 대한민국을 제대로 느끼게 된 것은 국토순례 당시였습니다.

내가 과연 한국에 살자고 왔는데 한국이 과연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고 내가 사는 게 정말 말이 안 된다, 그래 가지고 제가 1학년 1학기 마치고 다시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를 다시 뛰었어요. 한 달 동안. 그래서 이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한 번 이 돈을 가지고 가보자 해
가지고 그때 제가 300만원을 들고 무작정 떠나자, 처음에 부산에 갔어요. 거기서 인터넷이나 택시기사 아저씨한테 여기 부산은 좋은 데가 어디예요? 하면 아 저기 또 어디 자갈치 시장이 좋다고 하면 자갈치 시장가고, 광안리 좋다고 하면 광안리 가고 정말 19박 20일 동안 전국을 돌았어요. 그런데 정말 한국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넓은 나라였고 하나같이 다 열심히 살더라고요. 마지막에 정말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가서 거기서 고향도 한 번 바라보고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정말 여기서 정말 잘 적응하고 정말 잘 살아서 통일이 되면 정말 이렇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열심히 정말 잘 살았다고 얘기 할 수 있게 여기서 할 테니까 통일이 되기 전까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최광일씨는 매 순간을 치열하게 공부해 대학을 졸업했지만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취업. 최광일씨는 지원할 수 있는 모든 기업에, 자그만치 200여군데에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면접도 봤구요. 설마 두어 곳에는 취업이 될 줄 알았는데요. 모두 탈락이었습니다. 동기들이 하나, 둘 취업이 결정되면서 최광일씨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꼭 가고 싶은 회사를 선택했고, 그 회사가 요구하는 자격요건을 꼼꼼히 점검하고, 면접준비도 더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대기업 한 곳과 공기업인 인천환경공단에서 합격통보를 받았고, 인천환경공단에 취업을 했습니다.

기술 9급으로 입사를 했었는데요. 제작년도 5월에 이렇게 일도 열심히 하고 또 이렇게 해서 지금 회사에서 상도 받고 그리고 기술 8급으로 작년도 5월에 진급이 됐습니다. 제가 남들보다 특별히 잘하는 건 아니지만, 저 친구들과 못지않게는 하겠다. 뒤떨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했던 거 같아요. 모르면 물어보고 부족한 게 있으면 늦게라도 남아서 채워 가려고 하고, 또 기술적으로 모르는 게 있으면 책을 찾아가면서 계속 필기하고 공부하고 뭐 인터넷 사이트 에서 찾아보고 이러면서 노력을 했던 거 같아요. 그래가지고 이제는 정말 신입사원들한테 가르쳐 주고 그 친구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적인 문제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제가 기술을 전수해주고, 그 친구들이 회사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움도 주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광일씨는 현재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일의 전문성을 높이고 있는데요, 이런 성실함으로 최광일씨는 동료들에게도 열심히 하는 친구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최광일씨와 함께 일하는 유현우 주임과 이진호씨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보시죠.

남①이 친구가 현장에서 무슨 일이 터지면 제일 먼저 가서 뭐라고 한 개 더 하려고 하고, 하나를 가르쳐 주려고 하면 두 개를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서 정말 성실하고 착한 친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또 나이도 똑같아가지고, 저 같은 경우는 친구로 지내고 있거든
요. (최광일군처럼 북한에도)진짜 훌륭하고 생각이 좀 깊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많은 친구들이 있다고 한다고 하면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도 크게 문제없이 경제 발전도 더 많이 할 수 있고 굉장히 우수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②이 사람이 와서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다 보니
까 지금은 베테랑처럼 남한의 있는 사람들처럼 못지않게 학업도 열심히고, 그 다음에 기술
적으로도 참 우수한 인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지금은 듭니다. 저도 맨 처음에는 서먹서먹하
고 했는데 같이 일을 해보니까 남북이 통일이 되어도 같이 잘 어우러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가졌습니다.


최광일씨는 북한이탈주민이 열심히 살고, 잘 정착하는 것이 남북통일을 앞당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일 후를 준비하는 것은 남북을 모두 경험한 북한이탈주민들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게 5년 후에 됐든 10년이 되었든 정말 통일이 되고 정말 통일 되었을 때 우리 탈북민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고, 우리가 통일이 되면 정말 감당해야 될 몫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다닌) 한국폴리텍대학교가 직업 전문 위주의 학교인데 통일이 되면
북한에 그런 직업전문대학이 거기도 생길 거고 거기가 생겼을 때, 그 기술을 우리가 남한에서 배우고 현장에서 실물을 습득했던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위치가 우리한테 올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 때 봤을 때 저 같은 이런 기술엔지니어 이런 사람들이 그 위치에서 그 사람들 가르치고, 그 기술에 대해서 한국사에 대해서 정말 우리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겪었던 그런 거에 대해서 가르쳐 주면서 정말 빠르게 남한사회 이런데 적응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탈북할 때의 절박함을 잃지 않고 매 순간 노력하며 꿈을 실현하고 있는 최광일씨.
그가 터득한 기술과 지식을 북한 청년들에게도 전수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오늘 <목요진단 한반도>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나운서 배창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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