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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스포츠마케팅 전문가에 도전하는 김승기

2018-02-08

스포츠마케팅 전문가에 도전하는 김승기
스포츠마케팅을 전공하고 있는 김승기씨는 학회지에 발표할 논문준비가 한창입니다.

제가 기획하고 학회지에 내려고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엘리트 국가대표 복싱 선수들에 관해서 쓰고 있는데. 외국에 나갔을 때 선수들이 외국 선수들과 올림픽이나 지역별 세계대회에 나갔을 대 성적이 안나는 부분에 대해서 먼저 그 부분에 대해서 선행연구가 있는데 후속 연구로 국가대표 현황과 개선책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고 학회지로 낼 계획입니다.

북한이탈주민인 김승기씨는 현재 스포츠 전공 박사과정 중인데요, 북한에 있을 때 청소년 국가대표 권투선수였다고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에 축구를 시작을 했는데, 그걸 하다보니까 운동에 대한 매력에 빠져서, 기회가 주어져서 학교에, 체육학교인데 굉장히 좋은 학교에 시험을 봐서 붙게 되어서 그 때 복싱으로 전환을 해서 그 때부터 복싱 선수로 시작을 했죠. 제가 최초의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11경기 중에서 10경기를 TKO 아웃이라고 해가지고 처음으로 우승을 했었고, 그리고 제가 최초 제1호 청소년 국가대표부터 시작해가지고 국가대표 선수 생활도 좀 오래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로 말하면 전국체전 이런 랭킹을 4년 정도 1위를 가지고 있었고요. 올림픽을 준비하고, 올림픽을 나가기 위해서 국가대표가 됐을 때는 그만큼 실력 있는 사람들을 뽑는 거니까 선수로서는, 권투선수로서는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많은 혜택이라든가, 국가적인 상장, 포상... 일반인들이 받을 수 없을 만큼의 큰 것들을 많이 받았었죠.

김승기씨가 한국에 온 것은 지난 2005년, 20대 중반이었습니다. 정착초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다녔지만 북한에서의 운동선수 경험을 살리기 위해 8년전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워낙 운동을 좋아하는데다 권투선수로서의 자부심이 컸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고 포부도 대단했는데요, 학교생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단 북한에서 부르는 권투대신 복싱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생소했습니다. 어린 시절 권투를 시작한 김승기씨에게
권투, 아니 복싱은 하나의 새로운 스포츠 같은 느낌이었다고 하는데요. 복싱용어를 하나씩 배우던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제가 진짜 태어나서 제일 오래 몸을 담고 있었던 게 복싱이라는 운동이었는데, 처음에 왔을 때에는 기본적인 한국에서 쓰는 복싱의 용어 자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같은 운동하고 배우는 친구들한테서도 물어봤었고, 그 다음에 전공서적 같은 것도 많이 읽었어요. 이해가 안 되니까 외우다시피 하면서, 다행히도 전공서적이나 이런 것들은 그림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 용어가 다르긴 한데, 그렇게 했었고 제가 원래 지금도 똑같지만 복싱 경기를 보고 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가지고 시간 날 때마다 전국에 있는 시합이 열리는 엘리트, 국가대표선발전부터 해서 시합장은 거의 다 찾아가죠. 가서 그 친구들 응원하면서 자기네 팀 응원하면서 나오는 용어라든가, 이런 것들이 뭔지 한 두 개씩 그 친구들
통해서 알아가고 배워갔었죠.


낯선 용어를 배우고 익히는 것부터 시작한 김승기씨는 전공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체육전공 지도자로서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기 중은 물론 방학에도 시간을 쪼개가면서 학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이 십여개의 자격증을 취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본적으로 생활체육지도자라고 해서 일반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쉽게 말하면 체육관이라든가, 도장업을 하려면 그게 있어야 돼요. 지도자로서. 엘리트 선수들의 경기를 주관할 수 있는 그 자격증이 있어야 심판이라든가, 엘리트 시합하는 데에 참가하라 수 있는 그런 경기지도자 자격증, 그 다음에 지금 복싱도 태권도처럼 단증화가 되어있어요. 그런 복싱단증 한 6단을 가지고 있고, 보통 국가대표 수준 성적이 있는 이상의 급부터는 5단 정도 되거든요. 6단을 가지고 있고, 그 다음에 또 세계경찰무도연맹이라는 곳에서 사범으로 활동하고 있고 다양하게 운동을 좋아하다보니까 스포츠 마사지사, 카이로 프랙틱이라고 해서 뼈를 맞춰주고 하는 그런 것들을 많이 좋아하고 하다보니까 다양하게 있는 것 같아요. 또 최근에는 노인 스포츠지도사라고 해가지고 고령화시대에 들어가니까 자꾸 스포츠 스타일이 바뀌고, 사회적 환경에 따라서 흐름이 달라지니까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 최근에는 그런 걸 취득했던 부분이거든요. 저는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도전하고 싶고, 그런 것들을 시도하고 또 그런 데에서 성취감도 있기 때문에, 또 앞으로 지도자가 되려면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 같아요.

현재 김승기씨는 대한생활체육 복싱협회와 코리안 비트 복싱대회 심판위원, 세계경찰 무도연맹 시범과 공인 단증 심판관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입니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활약하면도 치열하게 학업에 매진중인데요, 함께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 정태린씨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굉장히 모범적인 박사과정생이고, 무엇보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오면서 굉장히 큰 생활의 변화 속에서도/본인의 장기를 살려서 그 부분을 가지고 남한 사회에서 정착을 해가고 있는 모습에서 굉장히 많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권투라는 종목에 대해서는 이미 지도자 생활을 충분히 해왔고, 그것을 본인의 발전을 위해서 학업을 하고 있다는 면에서 지도자로서는 아주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 않나. 그리고 기존의 우리나라 권투 종목이 강조해왔던 헝그리 정신이 그게 생활 속에 배어있는 친구라서 어떻게 보면 향후 21세기 우리나라 권투 종목에 있어서 더 부흥할 수 있는 훌륭한 촉매제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북한의 청소년 국가대표 선수출신으로 탈북 후 다양한 체육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스포츠 마케팅 전문가로 새 인생을 설계하기까지. 그동안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고비도 많았지만, 김승기씨를 붙들어 세운 건 처음 권투를 배울 때 들었던 ‘오뚜기 정신’이었습니다.


복싱이라는 자체가 굉장히 자기와의 싸움. 모든 스포츠가 똑같지만 특히 복싱 같은 거는 굉장히 사람을 상대 선수를 때려서 데미지를 줘야되고, 이런 부분이 있기 때문에 굉장히 자기와의 싸움이고 고된 운동이에요. 근데 운동을 배울 때에는 모든 운동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한 번 좌절하게 되면 다시는 그게 안 올라온다는 거죠. 경기력이라든가 수준이. 그것에 있어서 저는 항상 운동을 하면서 공부도 똑같고, 좌절은 안된다는 거. 그게 있어야, 좌절이 없어야 꼭 자기가 이루고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거죠. 오뚜기처럼, 물론 사람이 살아가면서 굴곡이 없는 사람이 없을 수 없잖아요. 좋은 날 있으면 나쁜 날 있을 수도 있고, 힘든 날이 있을 수도 하지만, 오뚜기처럼 언제나 힘들었을 때는 내가 행복했을 때를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서 계속 포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본인이 가려고 하는 꿈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거죠.

백 번 쓰러져도 백 번 일어서는 오뚜기처럼.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내서 도전하는 김승기씨의 목표는 체육지도자입니다. 후배를 양성해 스포츠를 통해서 남북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날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제가 항상 쫓는 거는 뭐냐면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자기 분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면 길은 꼭 있다는 거죠. 제가 가고 싶은 건 쉽게 말하면 체육학 분야를 가르치고 후대를 양성하는 교수가 되는 게 최종의 목표죠. 어쨌든 운동 쪽에 종사를 하면서 남북한의 스포츠 인들을 연결시켜서 단일팀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팀을 구성해서 같이 서로 교류하면서, 스포츠를 통해가지고 하나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게 제 목표죠.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팀이 단일팀으로 참가하듯이 복싱도 남북이 함께 팀을 이뤄서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오늘 <목요진단 한반도>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나운서 배창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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