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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北의 새로운 도시설계 꿈꾸는 남재현 건축가

2018-03-01

北의 새로운 도시설계 꿈꾸는 남재현 건축가
진짜 작은 집이 됐든 제가 설계해서 제가 직접 짓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제가 한옥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한옥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만약 지어드린다면 한옥 쪽으로,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싶은 게 이제 요즘 현대인들의 어떻게 보면 꿈이죠. 그것도. 저도 기회가 된다면 한옥으로 마당이 있는 집으로 지어드리고 싶어요. 저희 부모님에게.

부모님께 한옥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남재현씨. 이제 막 5년차에 접어드는 건축설계사인데요,
지난 2003년, 10대 초반에 가족들과 함께 탈북해 2년정도 중국에 머물다가 2005년에 남한에 정착했습니다.
처음 정착할 때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낯설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만 새로운 환경이 재밌었다고 하는데요. 남재현씨는 특히 운동을 잘해서, 친구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한에서는 보면 어렸을 때 애들이 집에서 만화를 보고 놀이방 가서 놀고 이러는데 북한에서는 그런 게 없잖아요. 밖에서 뛰어놀고 산을 타고 그러니까 잔근육 같은 게 좀 발달됐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일단 축구나 농구, 구기 종목 같은 경우는 좀 잘 했던 것 같아요. 운동회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럴 때 봤을 때 눈에 띌 정도는 했던 거 같아요. 그 때는 남자들이 좋아한다기보다 여자들이 더 좋아했죠. 저를. (웃음)/운동하고 들어오면 책상에 먹을 것이 올라와있다거나 그런 게 있잖아요. 음료수가 있고. 여자애들끼리 모여서 쑥덕거리고. 운동이 계기가 됐던 거 같아요. 그 이후로 축구를 하면 이제 팀이 반대쪽, 상대 팀이라는 게 있잖아요. 상대 팀을 만나고, 또 다른 동네 가서 또 하고 이러면서 다른 동네 친구도 만날 수 있었고. 저는 학교 가는 거는 싫었는데 이제 운동, 가서 축구를 한다, 체육 시간이 있다, 이러면 그 날은 이제 신나서 가는 거죠. 다른 과목은 좀 그래도 체육 시간이 있다고 그랬던 거 같아요. (웃음)

남재현씨는 학교에서 ‘운동 잘 하는 아이’로 통했고, 친구들과도 제법 잘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과정에서 진로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남재현씨는 함경북도 청진의 어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할아버지때부터 살던 집이 헐값에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남재현씨 가족은 허름한 오두막을 짓고 살아서 어린 시절 늘 따뜻한 집이 그리웠다고 하는데요. 그 때 그 기억이 남재현씨를 건축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일단 북한에 있을 때 저희 집이 좀 많이... 지금 생각하니까 동네에서 가장 허술했던 거 같아요. 비가 오면 비도 새고, 바람이 불면 이렇게 바람이 새서 들어오고, 그런 이유 때문에 좀 내 집에 대한 그런 갖고 싶은 생각이 좀 많았던 거 같아요. 북한에 있을 때는 그냥 마냥 내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거고 여기 와서는 이제 건축을 하면서 내 집을 직접 설계해서 짓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한 남재현씨는 건축설계쪽 공부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건축관련 국가 자격증도 여러 개 취득했습니다.
건축공부에 재미를 느낀 남재현씨는 좀 더 전문적인 공부를 위해 대학 건축과에 지원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재수를 준비하던 당시,
건축설계현장에서 실무를 쌓고, 대학에 진학하는 방법을 고민해보라는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의 조언과 추천에 따라 남재현씨는 건축설계사무소에 취직하게 됩니다.

10명 정도 되는 작은 설계 사무소더라고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죠. 처음에 들어갔을 때는 커피 타는 거 하고, 그리고 프린트 같은 거 하고, 청소 하고 그런 것도 잘하거든요. 제가 그런데 제가 하다가 어느 정도 1년 정도 지나니까 컴퓨터도 만지게 하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하다가...컴퓨터로 제가 자격증 땄던 거, 캐드. 캐드로 이제 도면을 그리게 하더라고요. 도면을 그리는데 이제 뭐 직접 그리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수정 정도만 시키시고... 나중에 나올 때 되니까 이제 많이 시키시더라고요.

그렇게 남재현씨는 생의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온갖 잡무가 남재현씨의 일이었지만. 현장과 사무실을 오가며 업무를 배우면서 차츰 능력을 인정받았고, 파격적인 승진까지 했습니다.

일은 굉장히 많아요. 한 번에 돌아가면 프로젝트가 6개씩 돌아가는데 그 중에 한, 두 개씩 그냥 총괄로 해서 맡겨주시더라고요. 밑에 직원들도 이제 한, 두 명 붙여줘 가지고 그걸 마무리 지을 수 있게, 회의도 직접 다닐 때도 있었고... 그 정도 일을 맡기셨던 거 같아요. 아파트를 지어줄 때 이제 필요한 도면을 저희가 그리는 사무실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도면을 처음부터 이제 잡고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그런 일을 했어요. 돈을 올려주고 직급을 제가 사원에서 대리를 안 달고 바로 팀장을 달아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파격적이다, 싶어서 일단 굉장히 기분이 좋았는데 좀 지나고 보니까 그게 직급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책임감이 따르더라고요. 책임감을 저한테 주신 거더라고요. 사회에 나와서 이제 얼마 안 되어서 그런 직급을 받았잖아요. 받으니까 굉장히 부담스럽고 힘든 부분이 더 많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 힘든 부분이 좀 지나니까 이제 저도 한 단계 성장을 한 거 같고.

그렇게 4년. 일도 익숙해 졌고, 회사에서 능력도 인정받았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지금까지의 치열한 도전을 잠시 멈추고, 쉬어갈 법도 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남재현씨는 또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건축사 예비시험 준비에 들어간 겁니다.

자격증을 따려면 기회가 아무한테나 있는 게 아니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 경력 4년이 필요하더라고요. 이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4년 동안 너무 제가 멈춰있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한 단계 성장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단 퇴사를 했어요. 퇴사를 하고 이제 1년 동안 쉬면서 도서관 다니면서 공부를 했죠. 시험장에 딱 갔는데 한 줄에 한 10명 정도 앉아있더라고요. 굉장히 뭔가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중에 반 이상이 떨어지는 시험인데 내가 붙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했는데 합격이됐더라고요. 너무 좋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같이 시험공부를 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좀 미안한 마음도 있고. 그 친구가 제가 좀 공부하는데 있어가지고 많은 도움을 줬거든요. 기분은 좋은데 그 친구를 봐서 표현을 못 하겠더라고요. 기분은 좋죠.

건축사 예비시험에 합격한 후 남재현씨는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훨씬 큰 규모의 회사에 입사해 현재 근무 중입니다.
남한에서의 13년. 되돌아보면 막막하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남재현씨는 ‘현재의 상황’이 만족스럽습니다.

일단 와서 느낀 건 참 모든 게 감사한 거 같아요. 집에서 씻을 때 뜨거운 물 나오는 것도 감사하고, 일하면 일한 것에 대한 대가도 받을 수 있고 이번에 취직하기 위해서 면접을 참 많이 는데 북한에서 온 것을 알고도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어떻게 보면 기회죠. 저한테는. 느낀 게 공평한 사회다, 저희 같은 북한에서 온 사람들도 노력하면 평범하게나마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참 좋은...좋은 사회인 거 같아요. 마음이 항상 따뜻해요. 마음은. 오늘 집 갈 때도 지하철 타고 가는 거, 그것도 감사한 거 같아요

남재현씨의 꿈은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건축가, 존경하는 건축가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출신의 건축 설계사로서 통일후 북한의 도시설계에도 참여하고 싶은 구체적인 꿈도 키우고 있습니다.

조사 관련해서 현장 조사 나간다고 해가지고 저희가 나가고 하는데 그럴 때 뭔가 희열을 느끼는 거 같아요. 내가 여기에 나만의 어떤 건물을 지을 수 있겠다, 이런 생각 때문에 좀 그럴 때마다 괜찮은 직업이라는 생각을 가져요. 제 고향이 청진이거든요. 청진 쪽에 뭔가 좀 신도시 같이 건설하고 싶는데, 제가 한다고 하면 이제 청진에 고향 땅에 이제 청진만의 랜드마크를 하나 설계해보고 싶어요. 이제 한국 같은 경우는 남산타워나 롯데타워 같이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뭔가 하나 설계를 해보고 싶어요.

남재현씨가 자신의 고향 청진의 랜드마크를 세우게 될 그 날을 기대하면서 오늘 <목요진단 한반도>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나운서 배창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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