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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사뿐히 역사를 즈려밟다

2014-11-14

사뿐히 역사를 즈려밟다
2014년 6월 22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카타르 도하 국립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8차 회의에서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확정했다. 남한산성은 이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

산보다 더 잘 알려진 산성
남한산성도립공원은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다. 그런데 ‘남한산을 올랐다’거나 ‘청량산에 가자’고 한다면 평소 산에 관심이 없었던 이들은 ‘어디 있는 산인데’라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한산성을 둘러봤다’고 말하면 등산 애호가이든 일반인이든 금세 알아듣는다. ‘산’보다는 ‘산성’으로 더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남한산(522m)과 청량산(462.6m), 두 개의 산에 걸쳐 있는 석성이다. 남한산성의 주봉은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이다. 산성 이름을 유래시킨 남한산은 내성에서 벗어나 벌봉-한봉으로 이어지는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다. 남한산성 성돌이는 4개의 문을 기점으로 한다. 이 중 많은 사람들이 찾는 코스는 남문에서 서문 북문을 도는 길이며 한적한 성곽 걷기를 원하면 동문 쪽으로 걸음하면 된다. 그 중 인조 임금과 관련된 구간은 남문~서문이다. 1636년 12월 14일 새벽, 청군에게 쫓기다시피 한 인조는 남한산성의 정문인 남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오게 된다.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할 때까지 조선의 조정은 ‘주화론’과 ‘주전론’ ‘으로 나뉘어 설전을 펼친다. 이 후 남한산성에서 47일간을 버티다 결국 항복을 하게 되니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항복을 받아들이는 제단)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 소설 ‘남한산성’에서 작가 김훈은 “결사 항전을 주장한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청과 화친하자는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고 표현했다.

남한산성의 역사
남한산성은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이었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으로 일컬어졌다.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이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난 가는 치욕을 당하자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을 다시 축조하기로 했다. 인조 2년(1624년)부터 인조 4년(1626년)에 걸쳐 수축된 남한산성은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소,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포대 125개를 갖춘 성이었다. 여기에 왕이 거처하는 행궁과 9개의 사찰이 성 안에 자리했다. 서울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남한산은 주변이 평지여서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장산, 주장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중심지로 볼 수 있는 경기 광주시의 지방지인 ‘중정남한지’에 따르면 ‘남한’은 북한에 대비, 한강 남쪽이라는 의미로 광주의 별칭이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남한산도 북한산과 대칭되는 산 이름으로 풀이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남한산성은 대한민국 남한산에 있는 산성으로 설명돼 있다. 연간 방문객은 280만 명 정도, 주말 뿐 아니라 주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여행명소 중 하나다. 이렇게 남한산성에 탐방객이 많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수도권과 인접한 탓도 있지만 주차장에서 바로 시작되는 성곽길 탐방로가 걷기에 편한 까닭이다. 남한산성 탐방로는 크게 5코스로 나뉜다. 짧게는 2.9km, 길게는 7.7km까지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맞춤코스다. 중간 중간 나 있는 샛길을 이용한다면 코스는 입맛대로 더 다양해진다. 거기에 성곽 탐방로 곳곳에 숨어 있는 역사 이야기를 꺼내 곱씹는다면 남한산성은 한나절 나들이만으로도 여행 허기가 단숨에 해결되는 걷기코스가 된다.

남한산성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조선 인조 2년(1624년)부터 인조 4년(1626년)에 걸쳐 수축된 남한산성은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소,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포대 125개를 갖춘 산성이다. 서문까지 걷는 성곽길 중간에서 늠름하게 서 있는 ‘수어장대’를 마주치게 된다. ‘장대’는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원래 5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수어장대만이 온전하게 남았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수어장대에 올라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남한산성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남한산성 치욕의 역사 때문에 비통하게만 느낄 필요는 없다. 서문을 넘어 북문을 돌아 동문까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은 성곽 안쪽에서 걸으면 역사와 나란히 걷는 듯하고 바깥쪽에서 걸으면 자연과 맞닿은 느낌이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남한산성의 역사를 돌아보자. 병자호란은 남한산성 축조 10년 만에 일어났다. 그러나 아무리 사료를 뒤져도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인조는 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 꿇었다. 청은 항복문서에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었다. 청나라 군대는 분명 남한산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느꼈다. 실제로 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는 해마다 사절을 보내 남한산성을 수축 또는 보수한 흔적이 있으면 문제 삼았다고 한다.

남한산성 안의 마을을 둘러보는 즐거움
남한산성 안에는 마을이 있어 로터리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남한산성 탐방의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왕이 임시로 머물던 행궁은 불에 타 없어져 지난 2003년 왕의 침소였던 상궐이 복원됐다. 업무를 보던 하궐도 올해 가을 복원이 완료돼 일반에 개방된다. 행궁 터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AD 2∼3세기경의 백제토기편들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백제시대부터 남한산성터가 군사적 요지임을 입증하는 자료들이다. 일제강점기에는 1907년 일본군이 산성내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사찰들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난공불락 요새의 위용과 치욕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성곽 길 안에 포개져 있는 셈이다. 로터리 구석구석 음식점이 성행한다. 하지만 이 로터리는 조선시대에도 사방의 길이 교차하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로터리에 설치된 종각에서 종을 울려 시각을 알렸다. 남한산성은 군사요새일 뿐 아니라 산속에 건설된 계획도시였다. ‘종로’는 서울에만 있는 지명이 아니라 각 도시 중심가의 공통된 이름이다. 남한산성 로터리는 산간도시의 종로거리였다. 남한산성은 성돌이도 좋지만 산성 안의 마을을 돌아보는 즐거움도 있다. 임금님의 임시 거처였던 행궁을 비롯해 종각과 종로거리 그리고 터리 주변의 음식점과 건물들이다. 더불어 남한산성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특별한 먹거리가 있으니 ‘조선 최초의 배달 음식’ 혹은 ‘양반들의 해장국’으로 알려진 ‘효종갱’이다. 배추속대· 콩나물· 표고· 소갈비· 해삼· 전복에 토장을 섞어서 종일토록 푹 고아 만든다. 1925년에 나온 《해동죽지》에 "광주성 안에서는 효종갱을 잘 끓인다. 밤에 국 항아리를 솜에 싸서 서울로 보내면 새벽종이 울릴 때 쯤 재상 집에 이른다. 국 항아리가 아직 따뜻하고 해장에 더 없이 좋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양 장안의 재상들이 시켜 먹었을 만큼 소문난 해장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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