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한국 최초의 야구단, YMCA 야구단

2010-10-02

한국 최초의 야구단, YMCA 야구단
한국 최초의 야구단, YMCA 야구단 창단
한국의 최초 야구단은 1905년에 결성된 YMCA 야구단으로 1901년 황성 YMCA 간사로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에 의해 결성되었다. 1874년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질레트는 콜로라도 대학을 졸업한 후 예일대학 YMCA에서 전도 담당 부목사로 재직하다가 한국 YMCA로 파송되었다. 한국 문화를 존중해서 매일 6시간씩 한국어를 익혀서 2년 만에 한국인과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한국어가 늘었다. 질레트는 황성 YMCA 초대 간사를 역임했는데, 만능스포츠맨으로 한국에 파송되면서 평소 즐기던 스포츠 도구를 챙겨왔다. 그 중 하나가 야구 도구로 1905년에 질레트의 주도로 한국 최초의 야구단, 황성 YMCA 야구단이 조직되었다.

YMCA는 1903년 조직되었지만, YMCA 회관이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07년이었다. 그때까지 YMCA는 인사동 태화관을 임시회관으로 사용했는데, 질레트는 그 앞 공터에서 캐치볼을 하다가 흥미를 가지는 한국 청년들에게 야구를 전파하게 되었다. 질레트는 한국 청년에게 야구를 가르치면 선교하기가 수월할 것이라 판단하고 미국에서 야구 용품을 도입해 1905년 YMCA 야구단을 창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YMCA를 시작으로 덕어학교, 영어학교, 일어학교 등 외국어 학교에서 야구단이 창단되었는데, 기록에 전하는 최초의 야구 경기는 1906년 3월 15일 훈련원 터에서 진행되었다.

규칙은 현재 야구와 대동소이했지만, 백 년 전 야구경기 모습은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유니폼 착용은 꿈도 꾸지 못했고, 선수들은 갓만 벗었을 뿐 잠방이에다 짚신 차림으로 운동장에 나섰다. 장비도 부족해서 글러브나 배트는 양 팀이 돌려가며 사용했고, 심지어 글러브는 투수, 포수, 내야수만 사용하고 외야수들은 맨손이거나 헝겊으로 손을 감싸고 수비에 나섰다. 배트가 부러지면 아교풀로 붙여서 썼고, 직접 각목을 깎아 배트를 제작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운동장도 펜스나 정규 규격으로 그려진 다이아몬드도 없고, 구장의 넓이도 규격에 형편없이 미달하는 동네 놀이터 같은 구장이었다. 또한 잔디밭이 아니라 맨땅이어서 슬라이딩이라는 고급기술은 구사할 꿈도 꾸지 못했고, 실수로 미끄러지기라도 했다가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규칙을 이해하지 못해 생긴 해프닝도 많았다. 타구를 처리하려는 야수를 주자가 일부러 들이받거나 태그를 피한다고 외야 곳곳을 휘저으며 달아난 사람, 그를 아웃시키겠다고 한사코 뒤쫓는 야수, 주자를 아웃시키겠다고 고의로 공을 몸에 맞혀 쓰러뜨리려는 야수 등이 나타나곤 했다.

동경 유학생 야구단
야구는 한국에 소개된 직후부터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야구 경기가 열릴 때면 수백 명의 관중이 운집하곤 했고, 응원하는 팀이 지면 상대팀 선수를 가로막고 항의할 정도로 야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특히 일본과 서양 열강에 대해 열등감이 심했던 시기에 동경 유학생 야구단이 서양 선교사들과 시합에서 19대 9로 대승한 것은 서양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호쾌한 소식이었다.

야구 운동은 구미 각국에서 성행하는 경기라, 우리나라 유학생이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재학하여 야구 운동을 일본 학생과 청국 학생과 경쟁하여 명성을 얻은지라, 이번 여름방학에 본국 학생에게 시범을 보이기 위해 야구단을 조직해 귀국하였는데, 재작일 하오 네 시에 서양선교사 제씨와 연합하여 훈련원에서 야구 시합을 벌였는데, 기호학회에서 오찬을 제공하고 사회 신사와 학생, 서양과 우리나라 부인들이 구름같이 모여 오륙백 인에 달한지라, 경기 결과는 아국 학생이 19점이요 서양 선교사가 9점이라, 승부의 결정되자 아국 학생들은 운동가를 제창하고 만세를 삼창한 후에 해산해 돌아가니 그 활발한 기상과 용감한 정신과 유쾌한 흥미는 실로 우리나라 학계에 초유한 성황이더라.
- 황성신문 1909년 7월 25일

동경 유학생들은 1909년 1월, 여러 단체가 난립된 유학생 조직을 통합해 대한흥학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대한흥학회는 여름방학 기간 모국방문단을 조직해 농촌계몽, 학예, 체육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 단체로 와세다대 재학생 윤기현을 단장으로 25명의 유학생으로 구성된 야구단의 시범경기도 그 중 하나였다. 동경유학생 야구단은 선교사들과의 경기 외에도 평양, 개성, 선천, 안악, 철산 등 한반도 서북지방을 순회하며 시범 경기를 펼치는 등 1937년까지 10차례 고국을 방문해 선진 야구 기술을 전파했다. 동경유학생 야구단은 최초로 유니폼을 맞춰 입고 경기에 임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장비로 무장하고, 뛰어난 기량을 선보여 한국 야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았다.

일본 야구단과의 경기
1912년 11월, 황성 YMCA팀이 일본 원정에 나섰다. 한국 못지않게 일본에서의 야구 인기도 대단했다. 일본은 이미 1870년대에 야구가 도입되었고, 야구 장비나 야구장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야구장이나 장비,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한국 팀 역시 실력이 부쩍 늘어 한국 팀에서는 상대할 팀이 없었고, 한국에 있는 일본팀에도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 본토 팀과 겨루기 위해 원정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경기 결과는 23대 0으로 일방적인 패배였다. YMCA 선수들 중에는 일본인이 두려워했던 빠른 볼을 던지는 선수도, 빠른 발을 과시하는 선수도 없었다. YMCA 야구단은 1승 1무 5패라는 처참한 전적을 남기고 쓸쓸히 귀국해야 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과 싸우는 경기를 이겨도 좋고 저도 그만이라는 단순한 승부로 보지 않았다. 죽기를 각오로 덤벼들어 무조건 이겨야 하는 처절한 전쟁이었지만 스포츠는 정신력만 가지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YMCA 야구단은 일본 원정을 통해 한국 팀은 힘과 기술이 없이는 아무리 강인한 정신을 가졌더라도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훈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한국 프로야구가 생길 수 있었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