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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제 밀정 노릇을 한 시대의 요부, 배정자

2010-10-09

권력의 중심에 있던 여인, 배정자
-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24일
전 한성판윤 배국태씨의 매제 배정자와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시종무관 박영철씨가 새문 밖 호텔에서 혼례를 재작일에 거행하였는데 혼인하는 예절과 잔치하는 음식을 다 서양법으로 하고 내외국 신사 수백 인을 청하여 대접하였다더라.


이 결혼식이 신문에 보도될 만큼 유명세를 탄 것은 신랑 박영철이 신부 배정자보다 9살 연하인데다가 배정자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까지 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때 미천한 관기였던 배정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를 자처하며 황실과 국정을 농간하고 있었고, 3번째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배정자는 대원군의 측근이었던 부친이 명성황후 집권 후 처형되자 모친과 함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밀양부 관기를 거쳐 통도사에서 출가했다. 그 후 통도사를 떠나 1885년, 부친의 친구였던 밀양부사 정병하의 소개로 일본인 밀정 마쓰오를 만나 도일해 망명 정객 안경수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1887년 김옥균 문하에 들어갔고, 그의 소개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어 수영, 승마, 사격, 벽장술 등 밀정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1927년 배정자의 구술을 바탕으로 편찬한 책 ‘배정자 실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실제 사실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대신 관기 출신이고 통도사에서 여승 생활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사실이다. 또한 1903년 일본공사관 통역 자격으로 귀국해 일본 공사관에서 생활한 것을 보면, 일본에 머무는 동안 스파이 교육을 받은 것도 확실해 보인다.

배정자는 엄비의 조카사위 김영진을 포섭해 엄비와 줄을 댔고, 엄비의 환심을 사서 엄비의 주선으로 고종을 만나게 되었다. 고종은 배정자의 미모에 반해 그를 전적으로 믿었고, 일본 정부 요인들과의 친분을 한국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를 자처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등 정계의 막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배정자는 한일 양국의 이중스파이를 자처했는데, 배정자가 구술한 '배정자 실기'를 보면, 1900년대 한일 외교는 배정자가 모두 처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거의 모든 일을 자신이 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정자가 아니라 정자의 한국이 되었으며, 이토의 정자가 아니라 정자의 이토처럼 되었다”고 기술할 정도이다.

배정자의 남성 편력
배정자는 1907년, 38살까지 세 번 결혼했다. 그 이후로도 숱한 남성과 동거하거나 결혼했다. 첫 번째 남편은 배정자가 관기로 있을 때 알게 된 전재식이라는 인물로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자 함께 동거하고, 전유화라는 아들까지 보았다. 하지만 전재식이 요절하는 바람에 배정자의 첫 번째 결혼은 얼마 못가 끝나게 되었다.

배정자의 두 번째 남편인 현영운은 대한제국 시기 무관으로 상당한 세력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종의 총애를 받는 배정자를 아내로 얻은 덕에 무관으로 출세한 것이다. 배정자와 결혼하기 이전 현영운은 일본공사관 조선어 교사에 지나지 않았는데, 배정자와 결혼한 직후부터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해 육군 참령, 육군 참장, 육군 총장, 삼남 순무사를 거쳐 궁내부 대신 서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혼 후 사기죄로 기소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 동아일보, 1925년 8월 21일<변태성욕자 배정자의 과거>
현재현영운과 몇 해를 살다가 무슨 싫은 생각이 났던지 현영운의 수양아우라고 하는 박영철이라는 나이 근 열 살 아래인 청년과 관계를 맺게 되어 현영운이 눈에 가시같이 되었더랍니다. 그래서 남편이 육군참장으로 있으며 한창 세도할 때 토색한 죄상을 일일이 밀고하여 현영운을 3~4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게하고는 감옥에 있는 남편 현영운과 이혼을 하는 동시에 박영철도 본부인과 이혼하게 하고 두 번째 결혼식을 하였더랍니다.

박씨와는 어떻게 5~6년 동안을 살다가 금전 거래가 있던 오바시라는 일본 사람과 또 관계를 맺어 박과는 갈라서고 그때부터 일본인들과 상관이 있어가지고는 정식 결혼도 없이 임시 임시로 그 생활을 하다가 모았던 돈푼도 그럭저럭 없어지자 그때는 모 은행에 사무원으로 있던 최덕이라는 청년을 데려다 두고 재산 정리를 함네하고 몇 해 동안을 또 살았더랍니다.

차츰 궁하게 된 배정자는 옛날의 부귀영화를 다시금 추억하여 경향간에 재산 많은 이를 물색하였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젊은 최덕이는 어디로 장가를 들여주고 황금정에서 무역상을 하고 있던 조병현이라는 늙은이와 관계를 두고 제3차의 정식 결혼식을 시내 모 예배당에서 하였더랍니다. 그리하여 그때 서울 장안에서는 “갈라서기도 잘하지만 결혼식도 너무 잦은걸”하는 비평도 한참 동안 높았었더랍니다.


배정자는 남성 편력도 대단했다. 조병현과 결혼이 끝이 아니라 20세 연하의 청년부호 정봉진, 25세 연하의 일본 순사 카와지리, 부호 조희경 등과 동거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배정자의 밀정 활동
한동안은 결혼과 이혼으로 밀정 노릇을 등한시하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시베리아로 파견되는 일본군을 따라가서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밀정 노릇을 재개했다. 그곳에서 포로가 되기도 하고, 마적단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면서도 일본군의 밀정으로 맹활약했다. 배정자는 중국 마적단의 두목과 동거하면서 정보를 빼내 일본군에 넘겨주기도 했다. 미모를 이용해 한․중․일 삼국을 넘나들며 스파이 노릇을 제대로 했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파괴하기 위해 과거 일진회 잔당들을 끌어 모아 무장 첩보단체 보민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에서 배정자는 발기인으로 참여해 고문이 되었다.

- 독립신문, 1920년 5월 8일자
배정자는 작년 하얼빈에서 다수의 동포를 적에게 잡아주고, 협잡을 하고 펑톈으로 도망하여 와서 펑톈 동포의 사정을 일본 영사관에 밀고하야 동포의 받는 곤란이 막심하외다. 아아 이 죽여 마땅할 요녀 배정자가 “나는 만주에 있는 백만 조선인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아아 언제까지나 저 요녀의 명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배정자는 1922년 국내에 들어와 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항일 독립투사를 밀고하는 일을 했다. 1924년, 57세에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총독부에서는 그 뒤에도 촉탁이라는 이름으로 봉급을 주며 넉넉한 생활을 하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1940년, 70세에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남양군도에서 조선 여성 100여 명으로 구성된 정신대를 관리했다.

해방 후 배정자의 삶
해방 당시 배정자의 나이는 76세로 반민족행위에 대한 응징이 두려워 집에서 숨어 지냈다. 1948년에는 반민족행위자특별처벌법이 통과되자 구속되어 반민법정에 섰다. 친일행위로 구속된 여성은 모두 6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배정자가 제일 먼저 검거되었다. 배정자는 반민법정에서도 자신은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이며, 고종이 자신을 정비로 삼으려 했다며 허세를 부렸다. 반민특위의 해산으로 감옥에서 나온 배정자는 주위에 돌봐 주는 사람 없이 어렵게 생활하다 1951년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8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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