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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성 교육과 독립 운동에 앞장선 신여성, 하란사!

2010-10-16

신여성 하란사
하란사는 187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김해 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것 외엔 가정 배경을 알 수 없다. 기생 출신이란 설도 있고, 인천 별감 하상기의 후처로 들어갔으니 상류 양반 계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란사가 자신의 성을 버리고 하씨가 된 것은 남편 하상기의 성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란사는 세례를 받은 후 얻은 영어식 이름 Nancy를 음차한 것이다. 하란사가 자기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른 것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후 미국식을 따른 것이다.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
남편 직장이 있는 인천은 항구였던 관계로 일찍이 일본, 중국을 통해 개화된 서구문명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여성을 위한 신교육기관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189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처음엔 기혼자란 이유로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당시 이화학당 교사로 있던 프라이를 밤중에 찾아가 가지고 갔던 불을 끄고는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줄 수 없겠느냐?"고 애원해 입학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1900년에는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남편이 인천 감리라는 고위 세무 공무원직에까지 오르게 됨에 따라 경제적인 면에서 부요하게 되고 신학문에 대한 하란사의 열정을 이해한 남편이 적극적인 후원을 했기에 가능했다. 하란사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어 1902년, 자비로 미국 유학의 길에 올라 1906년, 오하이오주에 있는 웨슬리안 대학에서 문학사(B.A) 학위를 받으면서 졸업했다. 한국 여성으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것은 하란사가 처음이었다.

한국인 최초 여성 교육자
하란사는 귀국 후 1906년 11월에 시작된 상동교회 안의 영어 학교 교사직을 맡아 스크랜톤 부인을 도와 영어와 성경 등을 가르치며 불우한 환경의 여인들을 깨우쳐나가기 시작했다. 1906년 이화학당 교사 겸 초대 기숙사 사감이 되었고, 1910년 이화학당 안에 대학과가 신설되면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실시되자 이 대학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참여하게 했다. 하란사는 좋은 교사였지만, 학생을 엄하게 대해 무서운 선생님이라는 평가를 더 자주 받았다. 사감으로 기숙사 사생에게 오는 편지를 일일이 검열하여 남자에게 온 편지가 있으면 내어주지 않았고, 품행점수를 60점씩 깎아 버렸다. 학생들에게는 '호랑이 어머니'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엄격했고, 욕설을 잘하기로도 유명해 어떤 상황에서든 욕을 사용했다.

민족운동가 하란사
하란사가 이화학당 교사로 부임한 1906년,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강연과 강의를 열고, 이문회라는 이화학당 학생 자치단체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미국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연설을 하며 얻은 돈으로 파이프오르간을 사서 모교에 기증하기도 하고,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는 교포들에게 700불의 기부금을 모아오기도 했다. 덕수궁에 드나들며 고종과 엄비에게 국제 정세를 알려주기도 했다. 순종은 하란사를 비롯한 일본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윤정원, 박에스터 세 사람을 치하하는 연회를 열기도 했다.

- 황성신문, 1909년 5월 5일자
부인 사회와 각 여학교에서 윤정원씨와 박에스터씨와 하란사씨가 외국에서 수업 귀국하여 여자 교육에 종사함과 생명에 근무함을 감복하여 지난달 28일에 경희궁에서 환영회를 열고 세 사람을 영접하여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역사를 관하건대 아국 500여년 부인계에서 외국에 유학하여 문명한 지식으로 여자를 교육함은 초유한 미사(美事)라 여자 학업이 앞으로 발달됨은 가히 찬하하겠도다.


하란사는 병탄 이후, 상실감과 분노도 컸다. 강제병합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해 몇 해에 걸쳐 1400여 호를 개별 방문해 전도를 해서 1911년에는 250명을 전도했다. 전도와 함께 배일 선전도 병행했다. 각 교회에 어머니 교실을 설치해 육아법과 선진 문명을 소개하는 한편,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계몽 강연을 했다. 계몽운동 외에 본격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한 것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외쳤을 때부터이다. 고종은 하란사에게 궁중패물을 자금으로 주어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을 파견할 계획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게 도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고종, 의친왕과 함께 파리강화회의를 통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려 했던 만큼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란사의 의문의 죽음
하란사는 3·1운동이 발발하기 이전인 1919년 1월 말~2월 초, 한국을 빠져 나가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교포가 베푸는 환영만찬회에 참석했는데,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베이징의 협화 의원 병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 재미교포단체에서 발행한 신한민보, 1919년 4월 24일자
우리나라 여자사회에 제일 선진 명사로 아메리카에 유학하고 모국에 돌아간 후 수십 년을 계속하여 여자교육에 정성을 다하던 하란사 부인은 이번 독립 대활동이 비롯된 후에 그 혈성을 민족적 활동에 바쳐 진행하면서 특별한 사건으로 지난 달 상순에 본국에서 떠나 중국 상하이로 나오다가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하니 그 사유는 도무지 알 수 없는바 일반 동포가 다 같이 창연한 느낌이 있을지며 더욱 우리 아낙네 사회에서는 큰 기둥을 잃은 듯 비창한 감회를 이기지 못하는 바더라.


하란사의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장례식에 참석했던 선교사 벡커는 시체가 시커먼 게 독약으로 인한 타살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하란사의 남편 하상기가 흉보를 접하고 베이징으로 다녀와서, “베이징 가는 도중 펑톈에서 어떤 동지를 만나 속뜻을 이야기한 게 오히려 하란사가 위해를 입은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하란사가 베이징으로 떠났을 때 밀정 배정자가 미행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일본 추종 세력에 의해 독살 당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미국에서 신문물을 배우고 돌아와 교육과 독립에 투신했지만 독립의 꿈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한 여성이 안타까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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