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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최영숙

2010-10-30

신여성, 최영숙
최영숙은 1906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포목상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최영숙은 여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최영숙의 부모는 여자가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딸의 상급학교 진학을 반대했지만 최영숙은 매일 예배당에 나가 백일기도를 드리며 완고한 부모를 설득했다. 가까스로 부모의 허락을 얻은 최영숙은 상경하여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3·1운동 직후 이화학당 분위기는 몹시 어수선했다. 학교는 입학식만 치르고 휴교에 들어갔다. 교사와 학생 다수가 투옥되었고, 최영숙의 1년 선배 유관순은 옥중에서 사망했다. 민족의식이 한껏 고조된 시기에 학업을 시작한 최영숙은 일찍부터 조선이 처한 현실에 눈떴다. 1923년 이화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최영숙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을 향해 유학길에 올랐다.

난징으로 건너간 최영숙은 명덕여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익혔다. 중국어를 배운 지 단 몇 달 만에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로 어학능력이 탁월했다. 이듬해 난징 회문여학교에 편입했는데 회문여학교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학생이었다. 영어, 독일어 능력은 다른 학생이 감히 넘보지 못할 수준이었고, 성악과 피아노 실력 또한 뛰어났다. 공부하는 틈틈이 상하이로 가서 중국에 망명 중이던 여러 인사와 교류했다. 당시 최영숙에게 큰 감화를 준 인물은 도산 안창호로 안창호도 총명하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최영숙을 남달리 아꼈다. 회문여학교를 졸업한 최영숙은 스웨덴 유학을 결심했다.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나다
경기도 여주군 태생으로 방년 21세 된 최영숙 양은 지난 7월13일 밤 하얼빈에서 구아연락열차를 타고 멀리 스웨덴을 향하여 떠났다. 최영숙 양은 사회과학을 연구하려고 단신으로 만리타국으로 간다고 한다. 지난 9일 기선을 타고 상하이를 떠나 다롄에 상륙했을 때, 최영숙 양은 일본 경찰에게 잡혀 큰 고초를 겪었다 한다. 그는 후일 고국에 돌아와 몸과 마음을 오로지 고국에 바치기 위해 이 같은 고생을 무릅쓰고 공부하러 멀리 떠난다 한다. 그는 나이 어린 여자의 몸으로 일어와 중국어, 영어에 정통하고, 매사에 재주가 뛰어나다.”
- 동아일보, 1926년 7월23일자

스웨덴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주요 관광지에서 벗어난 북유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가본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최영숙이 스웨덴 유학을 결심한 것은 엘렌 케이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엘렌 케이는 스웨덴 출신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운동가로 활동 무대인 서구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지만, 조선과 일본, 중국의 여성운동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910~20년대 동아시아의 자유연애와 여성운동은 엘렌 케이의 사상에 뿌리를 두었는데, 그의 저서가 우연히 번역되면서 동아시아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최영숙은 난징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스톡홀름에 도착했지만 엘렌 케이를 만나지 못했다. 엘렌 케이는 최영숙이 스웨덴으로 출발하기 석 달 전인 1926년 4월,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엘렌 케이는 만나지 못했지만 스웨덴에서 6년 동안 공부했다. 하지만 학비를 대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최영숙이 스웨덴으로 떠나기 직전, 그의 부친은 명태 무역에 손을 댔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고,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해 여주를 떠나 서울 홍파동 빈민가로 이주했다. 이에 최영숙은 시골학교 청강생 신분으로 낮에는 스웨덴어를 공부하고, 밤에는 생계를 위해 자수를 놓았다. 베갯잇 하나를 수놓으면 5, 6원의 수입이 생겨 그다지 힘들지 않게 공부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금까지 할 여유가 생겼다.

스웨덴에서의 유학 생활
1927년 스톡홀름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황태자 도서실에서 연구보조원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1926년 아돌프 황태자가 아시아 곳곳을 돌면서 수집해온 자료의 목록을 작성하고 중요 내용을 스웨덴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 능통하면서 스웨덴어까지 할 줄 아는 최영숙은 학구열이 왕성한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황태자 도서관에서 일한 덕분에 최영숙은 스웨덴 지식인들과 폭넓게 사귈 수 있었다. 1935년 스톡홀름대학 자연과학부 학장 스텐 베르크만 박사가 동식물 표본 수집차 조선을 방문했을 때는 '미스 최', 최영숙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최영숙은 스웨덴에서 가끔 향수에 젖기도 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풍요롭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지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굳이 귀국길에 올랐다. 고생해서 배운 지식으로 기울어진 집안도 일으키고, 나라를 위한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젯밤 침상 위에 누어 생각했다. 명년에 집에 가면 무엇을 먼저 할까. 부모님 노쇠(老衰)하고 형제들 약소하니 내 할 일 무엇보다 가정을 정돈할 것. 유일한 나의 오빠 완치될 그날까지 마음을 다 바쳐서 오빠 위해 희생할 것. 그 다음 민족 위해 일할 때에 공민학교 설립하고 노동계급 청년남녀 몸과 정신 수양하여 삶의 길을 찾게 하자.
- 제일선, 1932년 5월호 <최영숙이 스웨덴 유학 기간에 쓴 일기>

인도청년 미스터 로와의 인연
최영숙은 귀국길에 유학기간 동안 모은 돈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를 두루 구경하고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그러나 긴 여정에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덥고 건조한 이집트의 기후를 접하자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병석에 누워 요양하는 동안 스웨덴에서 가져온 여비를 거의 다 써버렸다. 남은 돈을 털어 인도인 노동자들이 타는 화물칸에 간신히 자리 하나를 얻었다. 병든 몸으로 화물칸에서 지내고 있는 최영숙을 도와준 사람이 사업차 카이로에 들렀다가 인도로 돌아가는 청년 실업가 미스터 로였다. 최영숙은 인도에 넉 달 동안 머물면서 미스터 로와 결혼까지 했다. 미스터 로가 인도에서 살자고 했지만 최영숙은 굳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임신한 줄도 모르고 혼자서 귀국길에 올랐다.

신여성이 되어 고국 길에 오르다
스톡홀름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어, 독일어, 스웨덴어, 중국어, 일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고, 세련된 국제 감각까지 갖췄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다. 유학을 다녀온 최영숙이 할 수 있는 일은 콩나물 장사밖에 없었다.

조선사회는 아직 인텔리 여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국어 교수 노릇을 하려고 애썼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어느 학교에 교사로 취직하려다가 문부성에서 교원면허를 내주지 않아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나중에 어떤 신문사의 여기자로 입사하려고 운동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할 수 없이 낙원동에 있는 여자소비 조합을 인계해서 사람의 왕래가 많은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 자그마한 점포를 빌려서 장사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배추, 감자, 마른미역줄기, 미나리,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직업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자본이 없는 일개 구멍가게로 어떻게 한 집안 생활비가 나오리까. 오직 최영숙 양은 살을 깎는 듯한 경제적 곤란을 당하고 지냈을 뿐입니다.
- 삼천리, 1932년 5월호

하지만 이마저도 오래 할 수 없었다. 귀국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2년 4월, 최영숙은 인도청년 미스터 로와의 관계에서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태아에 탈이 생겼고, 의사는 산모의 생명이라도 구하고자 낙태수술을 했지만 최영숙은 그 달 말 홍파동 자택에서 27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여자로 태어났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고, 이방인을 사랑했고, 혼혈아를 임신한 최영숙은 1930년대 한국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채 고생해서 배운 지식을 그토록 소망하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써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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