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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남성 중심주의 사회가 낳은 문화, 동성연애

2010-11-06

1930년대, 학생들 사이에 유행한 동성연애
1920~30년대 여학교에서 동성애는 남학생과의 자유연애처럼 자연스러운 하나의 유행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동성애를 경험했고, 그런 여학생도 여학교를 졸업하면 남자를 만나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성적 취향이나 정체성으로서의 동성연애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육체적 사랑이 완전히 배제된 순결한 정신적 사랑은 아니었다.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입니다. 그때 나는 여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기였습니다. 나와 동갑이고 예쁘고 재치 있는 한 여자 동무를 나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도 나를 사랑했습니다. 우리들은 시계도 꼭 같은 시계를 차고 머리모양도 꼭 같이 빗고 만년필도 꼭 같은 것을 썼습니다. 무엇을 사러갈 때도 꼭 같이 가고, 산보도 꼭 같이 다녔습니다. 나는 그이 없이는 살 수 없고 그이도 나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우리 둘의 사랑은 참으로 열렬한 사랑, 순결한 사랑, 아름다운 사랑, 고상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못 가서 우리들의 사랑은 그만 육체적 사랑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와 나는 늘 손을 잡고 다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껴안고 잘 때도 서로 살을 맞대고 잤습니다. 그렇게 만 3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오해로 그와 나는 영원히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나는 오래 동안 번민에 번민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이의 귀여운 얼굴과 아름다운 소프라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조광, 1937년 3월호 <동성연애>

1930년 동성연애는 대부분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남학생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열네 살 먹은 한 남학생이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나는 그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퍽 귀엽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그도 나를 무척 따랐습니다. 그는 운동도 잘하고 성적도 나보다 훨씬 우수했습니다. 그와 나 사이의 우정은 날로 깊어져 갔고, 학교가 끝난 후에는 집에 와서 늘 같이 지냈습니다. 그는 나를 마치 여성처럼 받아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손을 만지고, 껴안고, 뺨을 대고, 키스를 해도 다 가만히 받아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둘 다 남성이면서도 꿀 같은 연애생활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 조광, 1937년 3월호

동성연애가 유행했던 이유
당시 여학생들 사이의 동성연애에는 상대에 대한 깊은 '동정(同情)'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도 근본적인 원인이다. 자유연애가 도입된 지 한참이 지났어도 남성은 여전히 여성이 순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조, 순결은 남성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남성은 '가볍게' 연애를 걸었지만 여성은 '심각하게' 연애를 생각해야 했다. 당시 남성들은 여성이 동성애를 경험한 것은 문제 삼지 않았지만, 다른 남성을 경험한 것은 용서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생리적으로는 남성에 끌리더라도 남성을 믿지 못해 동성을 사랑하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조혼의 폐습이 남아 있어 본처 없는 남학생을 만나기 어려웠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한몫 거들었다. 결국 견고한 남성중심주의 문화가 여학생 동성애를 부추긴 셈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적어도 근대 조선에서는 동성애자가 성적 소수자가 아니었고,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도 없었다.

1930년대는 오히려 오늘날보다 너그러웠다. 신문, 잡지에 이광수의 아내이자 의사였던 허영숙, 기자였던 이덕요 등 여류 인사의 동성애 경험담이 실명으로 실리는 등 적어도 동성애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즉, 동성 애인이 함께 정사를 하지 않는다면 사회 문제가 될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성연애를 한 사람 중에는 동반 자살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동성연애자, 홍옥임과 김용주의 동반 자살
1931년 4월 영등포역에서 발생한 홍옥임, 김용주 정사 사건을 살펴보면, 당시 동성애자들의 자살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지난 4월 8일 오후 4시 15분 경부선 영등포역에서 서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때마침 인천을 떠나 영등포로 향해 오는 제428열차로 뛰어들어 젊은 여성 두 명이 철도 자살을 하였다. 그 한 사람은 홍옥임이라는 방년 21살 된 처녀. 그의 아버지는 일찍 서브란스 의전 교수로 있던 의사 홍석후씨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경성 종로 2정목 덕흥서림 주인 김동진씨의 딸로 동막 부호 심정택의 맏며느리로 출가한 김용주라는 방년 열아홉되는 젊은 아내였다."
- 별건곤, 1931년 5월호

이 사건이 관심을 끈 것은 두 사람의 사회적 직위 때문이다. 홍옥임은 저명한 안과 의사이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인 홍석후의 고명딸로 태어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쉬울 것 없이 자랐다. 자살하기 불과 일주일 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한 장래가 촉망되는 음악도였다. 김용주는 종로에서 덕흥서림이라는 큰 서점을 경영하는 김동진의 장녀로 태어나 자살하기 3년 전, 동덕여고보를 중퇴하고 동막 부호 심정택의 큰아들 심종익에게 출가한 주부였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자살할 이유가 없어보였지만 두 사람의 가슴은 상처투성이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동정하며 급기야 함께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29년으로 17세 소녀 김용주는 동덕여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김용주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얌전해 동급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홍옥임 역시 김용주를 흠모하던 동급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김용주는 학교를 끝마치기도 전에 아버지의 강요로 동막 부호 심정택의 큰아들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

김용주는 시집을 갈 때 가더라도 공부는 끝내고 가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지만 부모는 허락하지 않았다. 김용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심종익에게 시집갔다. 당시 심종익은 휘문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철없는 소년에 불과했다. 억지로 시집간 데다 시집살이도 심했고, 철없는 남편이 가정을 돌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경 유학을 떠났고, 유학에서 돌아와서도 유흥가를 전전하며 김용주를 지켜주지 않았다. 더욱이 김용주는 동덕여학교에 복학하기를 희망했지만, 기혼자라는 이유로 복학을 거부당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홍옥임의 아버지 홍석후는 1908년 동급생 6명과 함께 제중원의학과를 제1기로 졸업한 조선 최초의 국내파 의사였다. 제중원의학과는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한 이듬해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홍석후는 1921년부터 2년간 미국에 연수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졸업 후 줄곧 모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의사인 자신과 음악가인 동생 홍난파의 영향으로 홍석후의 자녀와 조카는 모두 의사 아니면 음악가였다. 홍석후의 가정은 지극히 명랑하고 쾌활한 미국식 '모던 가정'이었다. 홍석후는 아들은 여럿 두었으나 딸은 홍옥임 하나로 홍옥임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하지만 홍석후의 지나친 사랑은 홍옥임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쳤다. 홍옥임은 원하는 것을 갖는다고 더 이상 행복해하지 않았고, 반대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극심한 히스테리를 부렸다. 친구를 사귀면 며칠이 못 돼 싸우고 갈라서기 일쑤였고, 학업 성적은 매번 끄트머리부터 세어 올라가는 것이 빨랐다. 그러다 오빠의 소개로 세브란스의전 학생과 연애를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아버지의 외도 문제가 불거졌고, 연이어 애인에게 배신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용주는 가정 문제와 연애 문제로 갈등하던 홍옥임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남자에게 배신당한 홍옥임과 김용주는 서로를 깊이 동정하며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과 아픔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홍옥임은 수시로 김용주의 집을 찾았고, 두 사람의 우정은 어느 순간 사랑으로 발전했다.

김용주 : "인제는 네가 없으면 나는 죽는다."
1931년 정월보름이 지나간 지 며칠 안 되는 어느 날 김용주가 홍옥임을 붙잡고 말했다.
김용주 : "정말 너하고 떨어져서는 하루가 안타깝구나! 얘! 네가 이 집 첩으로 들어와서 같이 살자꾸나. 그러면 날마다 떨어지지 않고 서로 같이 지내지 않겠니."
홍옥임 : "어디 첩으로야 올 수 있니. 세상이 창피해서. 그 대신 내가 너의 집 부엌어멈으로 들어오면 날마다 한 집에서 지내고 그게 좋지 않을까?"
김용주 : "첩이고 부엌어멈이고 당장 들어와라. 너 없이는 내가 살지를 못하겠다."

- 별건곤, 1931년 5월호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만으로는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결국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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