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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비극적인 삶을 산 조선의 젊은 무희, 이상산

2010-11-13

조선 무희, 이상산!
이상산은 1909년 평안북도 길주군 덕산면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하나뿐인 여동생 이상순은 9세 연하로, 아버지는 품을 팔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해서 네 식구가 근근이 연명했다. 이상산이 18세 되던 해인 1926년 봄, 그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았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건너온 사람도 있었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건너온 사람도 있었지만, 아편 밀매를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유하게 사는 조선인들은 대개가 아편 밀매업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상산의 아버지 역시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아편 밀매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경찰에 발각되는 날에는 이역 땅에서 징역살이를 해야 했고, 자칫 폭력조직의 이권 다툼에 휘말리는 날에는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그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편 밀매도 장사인지라 밑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상산의 아버지는 밑천 마련을 위해 이상산을 홍등가에 팔았다.

이청해와의 만남
홍등가 생활을 하는 동안 이상산은 이청해라는 조선 청년을 만났다. 이상산의 단골손님이던 이청해는 조선에 있을 때 사상단체에도 관여한 정열적이고 씩씩한 청년으로 처음엔 돈과 육체로 맺어진 사이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청해는 영주할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것이 아니라 사상 관련 사건에 휘말려 잠시 고국을 떠나온 망명객으로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이청해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지 한 달쯤 지나서 이상산 앞으로 엽서 한 통을 보냈다. 발신자 주소는 없었지만 앞면에 찍힌 소인이 발신지가 상하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떠난다는 말도 없이 돌연 이렇게 당신의 곁을 떠나서 참말 무엇이라고 사죄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그러나 이것도 운명이라고 여기고 너무 슬퍼하지 마오. 나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오. 연애에 도취돼 부질없이 그날그날을 허비할 사람이 아니오. 이제부터는 나를 깨끗이 잊어버리시오. 당신의 행복을 빌며 붓을 놓소!"
- 개벽, 1934년 12월호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산의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산은 아버지가 남긴 800원의 유산을 어머니께 드려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하고, 자신은 상하이로 떠났다. 이상산은 상하이에서 무희로 돈을 벌면서 이청해를 찾아 나섰지만 3년 동안 이청해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대신 무희로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조선 무희, 이상산과 두 남자의 비극적인 사랑
이청해를 찾지 못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당시, 독일 청년 웨셀이 이상산에게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이상산은 이청해 때문에 웨셀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웨셀이 변함없이 이상산을 사랑해주자 결국 두 사람은 동거하기 시작하며 무희가 아닌 독일계 대제약회사 동양선전부장의 아내로 당당히 장안사로에 있는 큰 양옥의 안주인이 되었다.

웨셀은 5년을 한결같이 이상산을 사랑해주고, 이상산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하지만 독신이라고 했던 웨셀의 아내가 독일에서 나타났다. 웨셀은 이상산에게 자신을 독신이라고 속인 것이다. 이에 이상산은 웨셀에게서 떠나 다시 무희로 돌아갔다. 그리고 웨셀의 영국인 친구인 바톤이 이상산에게 구애하자 이상산은 웨셀에 대한 복수심으로 바톤과 동거했다.

웨셀은 독일에 아내가 있었지만, 진실로 이상산을 사랑했다. 그래서 이상산이 자신의 친구와 동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권총을 구해 새벽에 바톤의 집에 찾아가 이상산과 바톤을 살해한 후, 자신 역시 목숨을 끊었다.

"1934년 8월 13일 새벽 4시, 상하이에도 영국인이 많이 사는 정안사로의 한양옥 이층에서 밝아가는 늦은 여름의 고요한 새벽 공기를 여지없이 깨트리고 은은한 피스톨 소리가 연달아 세 번이나 들렸으니 보기에도 소름이 끼칠 비참한 국제 삼각연애의 피 묻은 비극은 소리 없시 만가를 읊으며 여러 사람들의 눈앞에 벌어진 것이었다. 비극의 주인공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출신 스물여섯 살의 젊은 조선 무희 이상산과 공동조계 공부국(工部局) 순사부장인 서른한 살의 영국 청년 바톤이었다. 두 사람을 살해하고 자살한 백인 청년은 독일계 대(大) 제약회사의 동양선전부장인 서른다섯 살의 독일 청년 웨셀이었다."
- 개벽, 1934년 12월호 <국제 삼각애의 혈제>

이상산은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나라가 망함으로써 남의 나라로 망명하고, 생계 유지를 위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홍등가에 팔려갔다. 그리고 첫 정을 줬던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애인을 찾아간 상하이에서 다른 사랑에 빠졌지만 또 다시 배신당한 후, 남의 나라에서 살해를 당하며 26세의 젊은 나이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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