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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 홍사익

2010-11-20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 44명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것은 고종의 양위 직후인 1907년 8월이었다. 일본의 강요로 야밤에 반포된 순종의 칙령에 따라 전투부대는 모두 해산되었지만, 군부, 육군법원, 육군무관학교 등 일부 비전투부대는 살아남았다. 군부와 나머지 부대마저 해산된 것은 1909년 7월로 통감부는 무관학교를 폐교하는 대신 생도 일부를 선발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1909년 8월 4일 44명의 무관생도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떠났다.

우리 무관 학도들아 학교 비록 폐지되어 학업 중지 되었으나 자긍심을 잃지 마세. 잠시 운수 불행하나 좋은 기회 또 있으니 우리 대한(大韓) 인종으로 일당천백 못할손가. 어화 우리 학도들아 저 동해를 건너가서 풍한서습(風寒暑濕) 쉴 때 없이 칼을 손에 놓지 말고 그 학업을 성취 후에 우리 국권 회복하여 유방백세 하여보세.
-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12일

관비유학생 44명은 육군사관학교 예과에 해당하는 육군중앙유년학교에 편입했다. '조선학생반'에 편성된 유학생들은 일본 학생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이 교육 훈련을 받았지만, 붉은색 견장을 다는 일본 학생과 달리 분홍색 견장을 달고 다녔다. 하지만 조선학생반의 수명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대한제국의 군인 신분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마지막 관비 유학생 44명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강제합방으로 군인은 될 수 있지만 조국을 지키는 군인은 될 수 없는 기구한 운명에 처했다. 조선학생반은 해체되었고,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분홍색 견장을 떼고 붉은색 견장으로 바꿔달아야 했다.

강제합방 당일 조선인 유학생들은 모여서 대책을 숙의했다. 전원 자퇴하고 귀국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왕 공부하러 왔으니 학교는 졸업하고 돌아가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모임은 의무복부기간이 끝나는 즉시 제대하고 귀국하기로 결의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훗날 약속을 지킨 유학생은 많지 않았다.

무관생도 홍사익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행도 44명 중 한 명인 홍사익은 대한제국의 장교가 되기 위해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파견되었다가 일본군 장군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홍사익은 1889년 3월 4일 안성읍 대덕면에서 홍이유의 3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무반 가문의 후예였지만, 홍사익이 태어날 때쯤에는 집안이 기울어 하루 세끼조차 챙겨먹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9세 연상의 형 홍사용 밑에서 자랐다. 신교육이 보편화되기 이전이어서 홍사익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는데, 사서오경을 통째 암기할 만큼 영특했다.

홍사익이 16세 되던 해인 1904년 9월, 육군유년학교가 설립돼 제1기 학도 100명을 모집했다. 6세 때 과거제도가 폐지돼 과거를 통해 입신할 길이 막혔던 홍사익은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신설되는 육군유년학교에 지원해 당당히 합격했다. 그러나 1904년 9월은 러일전쟁이 벌어지던 시기로 홍사익이 육군유년학교에서 수학하던 3년간 국운은 급격히 기울었다.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더니 졸업을 한 달 앞둔 1907년 8월에는 군대마저 해산되었다.

이처럼 서울과 지방의 일선 군부대는 모두 해산되었지만 군부와 육군법원, 시종무관부, 육군무관학교 등 일부 비전투부대는 살아남았다. 1907년 9월, 규모가 대폭 축소된 육군무관학교는 생도 25명을 모집했다. 홍사익은 두 차례에 걸쳐 치러진 입학시험에 차례로 통과하고 입학을 허가받았다. 하지만 군대 해산 이후 파행을 거듭하던 육군무관학교는 홍사익이 2학년 과정을 끝내기 직전인 1909년 7월 30일, 군부와 함께 폐지돼 홍사익은 동급생, 후배 43명과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홍사익의 일본 사관학도 생활
홍사익은 1912년 5월, 조선인 동기 13명 중 수석으로 중앙유년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성적이 우수해 일본국 황태자상을 수상하고 부상으로 은시계를 하사받았다. 육군사관학교 제26기생으로 입교한 홍사익은 1914년 5월 보병과 생도 471명 중 2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보병 소위로 임관된 뒤, 군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도쿄 제1사단 예하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다 1919년, 중위 2년차를 맞은 홍사익은 심리적 갈등을 겪었다. 강제병탄 당일 약속대로라면 의무복무기간이 끝난 1년 전 이미 전역했어야 했지만, 16세부터 31세가 된 지금까지 거의 반평생을 군대에서 보낸 홍사익은 군복을 벗고 다른 일을 하면서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동기생 조철호 중위가 1년 전 군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 오산학교 교원이 되었을 때만 해도 갈등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1919년은 달랐다. 3·1운동 이후 3년 선배 김광서 중위, 동기 지대형 중위, 1년 후배 이종혁 중위가 차례로 소속 부대에서 탈영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청천이란 가명으로 독립군 대장으로 활약한 지대형은 홍사익에게 수시로 사람을 보내 독립군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다. 심리적 갈등은 컸지만 홍사익은 군인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끝내 일본 군복을 선택했다.

당시 조선인으로 일본군 장군이 된 사람은 모두 7명으로 홍사익과 영친왕을 제외하면 모두 대한제국 시기 장군이었다. 영친왕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고, 병탄 이후 일본군 장교로 임용된 사람 중 황실 사람을 제외하면 장군으로 승진한 사람은 홍사익이 유일했다.

홍사익의 일본 군 생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조선인 장교들은 조선군사령부 예하부대에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홍사익은 30년 군 생활 동안 단 한 차례도 조선에서 근무하지 않았다. 조선인을 괴롭혀 얻은 성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홍사익은 주로 도쿄와 만주, 상하이 주둔 부대의 교육과 정보 관련 부서에 보직되었다. 도쿄 제1사단이나 관동군 같은 일본군 핵심부대에 배속되었지만, 전투부대 지휘관이나 작전참모 같은 핵심보직은 맡지 못했다. 홍사익은 능력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일본군 수뇌부조차 인정한 최고의 군인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에서 중용되기에 조선인이라는 한미한 출신 성분은 너무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1944년 3월, 일본 육군성은 홍사익 소장을 필리핀 포로사령관에 임명했다. 필리핀 포로사령관은 필리핀 전역에 있는 크고 작은 포로수용소를 총괄하는 자리였다. 홍사익은 미군 포로 1,300명과 민간인 억류자 7,000여 명을 육군성이 제정한 포로수용소 규칙에 따라 관리했다. 일본은 제네바협정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네바협정에서 금지한 비행장 건설에 포로를 동원한 것도 1만 명 포로와 민간인 억류자를 죽음의 행군으로 내몬 것도 일본군 포로수용소 규칙에 따르면 합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에 승리한 미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군 포로를 학대한 일본 필리핀 주둔군 포로사령관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홍사익은 미군이 주도한 전범 재판에 회부돼 1급 전범으로 한때 그가 관리하던 필리핀 포로수용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유족에게 전달된 유품에는 순종이 내린 군인 칙유와 일본 황태자에게 하사받은 은시계뿐이었다. 대한제국의 장교가 되기 위해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파견되었다가 군이 좋아 일본에 남았던 홍사익은 일본군 장군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군인으로서의 정신만큼은 놓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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