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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희대의 비극적인 사랑, 윤심덕과 김우진 1

2010-11-27

희대의 비극적인 사랑, 윤심덕과 김우진 1
윤심덕, 김우진 생존설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은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목숨을 던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1926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윤심덕, 김우진 정사 사건은 여러 차례 영화로도 만들어 질 정도였다. 하지만 1926년, 윤심덕과 김우진이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 선상에서 사라진 이후, 두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에 생존해 있다는 생존설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러다 1930년 12월,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과 김익진은 총독부에 수색원을 제출함으로써 한동안 잠복했던 윤심덕, 김우진의 생존설은 또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생존설은 윤심덕과 김우진이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했다는 것은 한낱 연극일 뿐이고 실상은 도쿠주마루 일등선실 급사를 매수하여 정사한 것처럼 위장한 후 나사사키를 거쳐 상하이로 가서 중국인 명의로 다시 이태리로 건너간 후 로마에서 악기점을 경영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는 것이다.

문제의 여성 윤심덕이 현해탄의 사나운 파도 속에 몸을 던져 고기의 밥이 되었다는 소식은 조선사회에 일시 비상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람이 둘만 모이면 “윤심덕이 죽었다지?”, “응 죽었대.”, “왜 죽어버렸을까?”, “그야 알 수 있나!”, “그 쾌활한 윤심덕이 자살을 하다니.”, “그러게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지.”라는 대화가 오갈 만큼 윤심덕 자살에 관한 이야기는 전 사회의 관심을 모았다. 윤심덕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녹음한 ‘사의 찬미’라는 레코드는 수만 장이 팔려 음반회사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말만 들어도 전 조선을 풍미하던 비상한 인기를 능히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 윤심덕이 애인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은 한낱 능청스러운 연극에 지나지 않고, 지금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태리 나폴리에 생존해 있다는 풍문이 떠돈다. 그러나 과연 윤심덕이 이태리에 살아 있다 하면 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으니 그동안 한 번이라도 그의 집에 서신이라도 띄웠을 것이련만 그도 없다 하니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윤심덕이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든지 아직 안 되었든지 어쨌든 거친 인생의 행로를 걸어온 그의 고달픈 영혼에 안일한 행복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 조선일보, 1928년 1월 10일

이에 유족들은 총독부에 수색원을 정식으로 제출했다. 1931년 11월, 이태리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우진 유족에게 로마에는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살지 않으며, 동양인이 경영하는 악기점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존설에서 제기한 것과 같이 중국 여권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살 경우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사의 찬미, 윤심덕! 그녀는 누구인가?
윤심덕은 1897년 평양 순영리에서 부친 윤석호와 모친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부친은 나물장사를 하고 모친은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지만, 네 자녀를 모두 훌륭히 교육시켰다. 맏딸 윤심성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으로 출가했고, 막내딸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심덕의 하나뿐인 남동생 윤기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음악학교와 오하이오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윤심덕은 '6척(180cm) 장신'이라 불릴 만큼 키가 컸고, 어려서부터 성격이 사내아이 같이 활달해 '왈녀'라 불렸다. 둘째였지만 4남매의 리더 역할을 했고,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만큼 우애가 남달랐다. 여기까지가 학계에 공인된 윤심덕의 가정환경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기록도 전해진다.
윤심덕씨는 듣건대 원래 평양 어떤 기생의 따님이라고 합니다. 그 기생은 딸을 낳고 생각다 못해 자기 동네에 사는 어떤 큰 부잣집의 후원 소나무 밭에 갓난애를 눈물 머금고 버렸습니다.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집 사람이 쫓아 나와 생후 한 달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거두어 친부모같이 귀애하며 길렀습니다. 친부모같이 주어다가 기른 이가 바로 윤성덕씨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윤성덕 씨와 윤심덕 씨는 자매가 된 것이라 합니다.
- 삼천리, 1932년 7월호 <가인춘추>


윤심덕이 14세 되던 해에 집안이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이사하자 윤심덕은 평양 숭의여학교로 전학했다. 평양에 이주한 이후 모친 김씨는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광혜여의원에서 일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홀 부인은 윤심덕의 후견인이 되었고, 의사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홀 부인의 권고에 따라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평양여고보에서 공부하면서 윤심덕은 의사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15년, 윤심덕은 총독부 관비유학생에 선발돼 교사생활을 1년 만에 청산하고 도쿄 유학을 떠났다. 아오야마가쿠인(청산학원)을 거쳐 도쿄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도쿄음악학교는 우에누(상야)공원에 위치해 우에누음악학교라고도 불렸다.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윤심덕의 남성 편력
도쿄 유학을 떠난 윤심덕은 공부에만 매달리지는 않았다. 도쿄에서 유학생들과 폭넓게 교유했는데, 왈녀라는 별명처럼 성격이 남성적이고 쾌활해서 남학생에게도 내외하는 법 없이 몇 번 만나면 서슴없이 말은 놓았다. 홍난파, 채동선, 김우진 등 숱한 남학생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자기가 싫으면 아무리 구애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니혼 대학 문과에 다니던 박정식은 윤심덕에게 반해 약혼하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애편지를 보냈다. 꽃다발과 사랑의 시를 전하면서 전력을 다해 구애했지만, 윤심덕은 냉정하게 뿌리쳤다. 박정식은 실연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해 몇 년 동안 총독부병원 8호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박정식의 친구들이 윤심덕에게 찾아와 사랑을 받아달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심덕을 짜증을 낼 정도였다. 이처럼 싫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쌀쌀하게 대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서슴없이 애정을 표시했다.

김우진 역시 도쿄에서 윤심덕이 염문을 뿌렸던 숱한 남성들 중에 한 명이었을 뿐 윤심덕이 사랑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1921년, 윤심덕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김우진, 홍난파, 조명희 등 30명의 청년들과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인 동우회의 운영비 모금을 위해 고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 윤심덕은 김우진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김우진은 목포에 아내와 딸이 있었고, 도쿄에서 일본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선머슴 같은 윤심덕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윤심덕도 동우회 순회공연단에 참여한 다른 청년과 친밀한 관계여서 김우진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동우회 순회공연단은 일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해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공교롭게도 여관방이 모자라서 윤심덕은 독방에서 자지 못하고 남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윤심덕과 가장 가깝다는 그 청년도 같은 방에서 잤다. 밤이 조금 이슥해서 같이 자던 청년이 윤심덕의 정조의 단물을 한번 맛보고자 윤심덕에게 수상한 행동을 했다. 그때 윤심덕은 갑자기 일어나며 그 남자의 뺨을 치고 “나는 네가 그 같이 더러운 남자인 줄 모르고 가깝게 사귀었더니 이것이 무슨 금수의 행동이냐?”며 준열히 책망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너무도 무안하고 민망해서 당장 백배사과하며 이후 다시는 그 같은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애걸복걸했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윤심덕은 여전히 그 남자와 가깝게 지낸다 한다.
- 동아일보, 1925년 8월 4일

희대의 비극적인 사랑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윤심덕과 김우진이 고국 순회공연에 동행한 것은 맞지만 당시만 해도 두 사람은 사랑하던 사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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