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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희대의 비극적인 사랑, 윤심덕과 김우진 2

2010-12-04

희대의 비극적인 사랑, 윤심덕과 김우진 2
극작가 김우진
김우진은 윤심덕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한국 신연극을 완성했다고 할 만큼 한국 예술사에는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김우진은 1897년 목포의 대지주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심덕과 동갑이었지만, 성격이나 가정환경은 판이했다. 가난한 집 둘째딸로 자란 윤심덕이 쾌활하고 대범했음에 반해 부잣집 맏아들로 자란 김우진은 예민하고 신중했다. 김우진은 어려서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지만 완고한 부친은 장남인 그가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김우진은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심상고등소학교를 다니다가 1915년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 구마모토농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졸업 후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김우진이 윤심덕을 처음 만난 것은 와세다대학 2학년 때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만남
김우진이 윤심덕을 만날 당시, 김우진에게는 일본인 간호사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졸업을 한 해 앞둔 1923년, 백혈병으로 사망했고, 여름방학 동안 김우진은 목포 본가에서 지내며 죽음이 앗아간 실연의 아픔을 달랬다. 그리고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으로 돌아온 윤심덕에게 동생들과 함께 목포로 놀러오라는 편지와 함께 차표 3장을 보냈다. 윤심덕은 윤성덕, 윤기성과 함께 목포로 내려와 김우진의 집에서 조촐한 가족 음악회를 열었다.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소프라노 윤심덕과 바리톤 윤기성이 노래를 불렀다. 김우진은 윤심덕 남매를 극진히 대접했다.

실연의 아픔에 빠진 김우진과 달리 1924년 도쿄 유학을 마치고 금의환향한 윤심덕은 성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윤심덕이 독창자로 나서지 않는 음악회가 없을 정도로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독창자로 나선다고 수입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관비유학생이 귀국하면 관립학교 교사로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몇 달을 기다려도 교사 발령이 나지 않았다. 윤심덕은 조선 최고의 성악가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정작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운 지경에 내몰렸던 것이다.

또한 도쿄 유학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남성들이 윤심덕에게 구애했지만, 혼처가 마땅치 않았다. 재산이 있는 남성은 죄다 기혼자였고, 그에게 구애하는 미혼자는 재산이 없었다. 한때 함경남도 대부호의 아들 김홍기와 혼담이 상당히 진전되었지만 신랑 집안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혼담을 파기했다. 비슷한 시기 윤심덕은 엄청난 스캔들에 휩싸였다.

윤심덕이 한창 성악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을 때, 그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생겼다. 남동생 윤기정이 미국에 유학을 가려고 운동하여 이미 여행권까지 나왔으나 다만 여비가 없어서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윤심덕은 동생의 여비를 변통해 주려고 각처로 애를 많이 썼지만 선뜻 돈을 대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이용문이 동생의 여비를 자기가 부담하겠다며 모월모일 돈을 내어주겠으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약속한 날짜에 윤심덕은 돈을 받으러 이용문의 집을 찾아갔다. 윤성덕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윤심덕은 굳이 자기 혼자서 다녀오겠다며 동생을 때놓고 혼자서 갔다. 윤심덕이 다녀간 날 이용문의 계좌에서 600원이 인출되었다.

그 밖의 사실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거니와 그 이후로 윤심덕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때 세상에는 윤심덕이 시내 모처에서 이용문과 살림을 하느니 어쩌느니 하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이것도 양편에서 절대 비밀에 붙이는 일이라 오직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윤심덕이 자기 일신의 안락을 위하거나 허영에 눈이 어두워 이용문과 가깝게 사귄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뿐인 자기 남동생을 미국에 유학 보내려는 정성으로 이용문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동아일보, 1925년 8월 7일

윤심덕과 스캔들에 휘말렸던 이용문은 대한제국 내장원경과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을 지낸 이봉래의 아들로 이용문 자신도 대한제국 정삼품 장례원 전례를 지냈다. 을지로 일대 3만여 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고, 소문난 호색한이었다. 이용문과 부적절한 관계가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자 윤심덕은 더 이상 조선에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하얼빈으로 도피해 반년 동안 은거하다가 1925년 6월 형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언니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귀국했다.

그 무렵, 김우진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목포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김우진은 문학과 연극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부친의 강요로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상성합명회사는 김우진 집안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를 관리하는 회사였다.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떠맡은 김우진은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낮에는 회사 일을 돌보고 밤 시간을 이용해 작품을 읽고 썼다. 부친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간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스캔들에 휩싸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윤심덕보다 나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처지를 위로했다.

1926년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광무대에서 상설 공연을 하는 토월회에 입단할 것을 권했다. 조만간 집을 나온 후 극장을 차려 윤심덕과 함께 운영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사회는 여배우를 기생처럼 여겼다. 여배우가 되는 것은 신세를 망치는 일처럼 인식되었기에 극단들은 여배우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시절, 한때 악단의 여왕으로 명성을 떨치던 윤심덕이 여배우가 되겠다고 자원해서 나서자 토월회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윤심덕이 공연에 출연한다는 광고가 나가자 이용문과 염문을 뿌려 하얼빈까지 달아난 뻔뻔스러운 여자 얼굴이나 보자고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윤심덕은 배우로 성공하지 못했다. 몸짓은 둔하고 부자연스러웠고, 발음이 부정확해서 대사가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이후 윤심덕에게 유일한 낙은 상경한 김우진과 오쿠다사진관 2층에 마련한 자신의 거처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별
1926년 6월 김우진은 2년 동안의 목포 생활을 청산하고 집을 나왔다. 가업을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예술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하자, 부친은 잘 가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맏아들을 내쫓았지만, 모친은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3천원을 마련해주었다.

집을 나온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쿄로 건너갔다. 김우진이 도쿄로 떠난 지 한 달 후 윤심덕은 음반 취입과 미국 유학을 떠나는 동생 배웅을 위해 오사카로 건너갔다. 윤심덕이 오사카 닛토레코드에서 27곡을 녹음했다. 원래 계약은 26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지만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노래 한 곡을 더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윤심덕이 노래하고,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 반주한 그 노래가 바로 '사의 찬미'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
닛토 레코드에서 27곡을 녹음한 후 도쿄에 있는 김우진에게 당장 오지 않으면 죽겠다며 전보를 쳤다. 이에 김우진은 황급히 윤심덕에게 달려왔고, 1926년 8월 3일, 윤성덕이 미국행 선박을 타기 위해 요코하마로 떠나자 윤심덕과 김우진은 시모노세키로 가서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 탑승했다. 도쿠주마루가 쓰시마 섬 앞바다를 통과할 때 갑판을 순찰하던 급사가 일등실 객실 문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객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자 여행가방 위에는 '보이에게'로 시작되는 메모지 한 장과 팁 5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메모지에는 짐을 윤심덕과 김우진 본가로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윤심덕과 김우진이 현해탄에 뛰어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현해탄에 뛰어든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가장 큰 가능성은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이지만 문제는 윤심덕과 김우진이 정사를 할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나 하는 점이다.

윤심덕은 김우진만 사랑한 순간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언제나 동시에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눴고, 김우진은 유부남이었다. 또한 김우진이 일본 간호사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어도 윤심덕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살림을 차린다고 손가락질하거나 뜯어말릴 사람도 없었다. 1920년대 조선사회에는 '제2부인'이라는 용어가 있을 만큼 유부남과 처녀가 사람을 차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열렬히 사랑한 흔적도 없고,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을 장애도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각자의 고뇌 때문에 각각 죽음을 결심했고, 혼자 가기 두려운 저승길을 동행했거나 죽음을 결심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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