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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돈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준, 백선행 여사

2010-10-23

교육가이자 사회사업가, 백선행
백선행 여사는 평양에서 이름 높은 교육 사업가이자 사회사업가였다. 백선행 여사는 16세 남편을 잃고 평생을 홀몸으로 살면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근검절약으로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사회를 위해 써서 평양은 물론 전 조선인의 어머니처럼 숭상 받던 인물이다.

평생을 과부로 산 기구한 여인
백선행은 1848년 헌종 15년에 백지용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지용은 평양 박구리에 살던 가난한 농민으로 백선행이 7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모친 김씨는 죽은 남편이 남긴 가난과 고독 속에서 하나뿐인 딸을 애지중지 길렀다. 편모슬하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성장한 백선행은 14살에 가난한 농민 안재욱에게 출가했다. 그러나 남편 안재욱은 병약해 결혼 직후 병석에 누웠다. 백선행은 어려운 살림에도 좋다는 약이면 백방으로 구해 써보았지만 남편의 병세는 날마다 악화되었다. 죽음에 임박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왼손 무명지를 칼로 그어 흐르는 피를 입에 떨어뜨려도 보았으나, 야속한 남편은 겨우 닷새를 더 버티다 자식 한 명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6살에 과부가 된 백선행은 다시 과부 어머니를 찾아 친정으로 돌아왔다. 개가하여 팔자를 고치라는 동네 사람의 권유도 있었으나 20살 전의 과부는 세 번 남편을 갈지 않으면 불행을 면치 못한다는 미신이 주는 공포와 어머니 과부의 신세를 생각하여 과부 모녀는 죽기까지 떨어지지 않기로 맹세하고 새 생활을 개척했다. 청대 치기와 간장 장사, 베 짜기 등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를 생활신조로 삼고 열심히 일하다보니 과부 모녀의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10년을 하루같이 살다보니 150냥짜리 집 한 채와 현금이 1000냥 남짓 생겼다.

구차한 살림살이를 겨우 면했을 때, 모친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봉양 한번 제대로 못하고 모친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도 서러운 일이지만, 모친의 상여 뒤를 따를 상주 한 사람 없는 게 더 원통한 일이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찾아온 친척들은 백선행에게 사후 양자를 들여 상주로 삼으라고 권했다. 백선행은 친척들의 권유대로 조카뻘 되는 친척을 모친의 사후 양자로 입적해 장례를 치르게 했다. 양자는 장례와 제사에는 관심이 없었고,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양자는 상속 문제를 들고 나왔다. 백선행은 현금 1,000냥을 양자에게 모두 빼앗기고 150냥짜리 집만 겨우 얻을 수 있었다.

재산을 빼앗은 양자 일파가 집을 떠나자 백선행은 악귀를 쫓을 때 하는 평안도 풍속에 따라 문간에 콩을 뿌렸다. 모친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후, 다시 10년을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살다보니, 50여 석 추수의 땅문서가 생겼다. 백선행은 생활비는 일해서 생긴 돈으로만 충당하고, 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땅을 불려 나갔다. 그리고 30대 후반 쯤에는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백선행이 돈에 집착한 것은 조선 시대에 과부의 몸으로 혼자 살기 어려워 돈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탐관오리들은 백선행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칼을 든 강도가 백선행의 집을 침입했다. 백선행은 현금을 벽지 안쪽이나 이불 속 등 집안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기 때문에 숱한 강도가 침입해도 엽전 한 닢 훔쳐나간 강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백선행은 사람을 좀처럼 믿지 않았다. 평생을 과부로 수절하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허튼 욕심 부리지 않고 매사에 신중했지만 딱 한 번 교활한 거간에게 속아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1917년 백선행은 평양에서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강동군 만달산 부근의 토지가 좋다는 거간의 말만 믿은 채, 평당 7~8원을 주고 수천 평의 땅을 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땅은 석회질이 많아서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황무지였다. 1~2전을 받고도 팔기 어려운 박토 중에 박토였다. 그런데 이 박토에서 시멘트의 원료가 채굴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금싸라기 땅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백선행은 이 땅을 일본인에게 산 가격의 10배를 받고 되팔아 동네 부자에서 평양에서 손꼽히는 대자산가로 성장했다.

갑부가 되어도 백선행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 온 손님에게 냉면을 대접했다가 찌꺼기를 남기는 이가 있으면 아까워하며 따로 보관해두었다가 나중에 먹을 정도로 검소했다.

본격적인 사회사업
1908년, 백선행이 환갑이 되던 날 백성행은 남편의 묘소가 있는 대동군 객산리에 다 쓰러져 가는 나무다리를 3,000원 가까운 사재를 털어 돌다리로 바꿔줬다. 객산리 사람들은 백선행의 음덕으로 준공된 다리를 ‘백 과부 다리’라 불렀다. 그러나 ‘과부’란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백 과부’라 부르기 민망하다 하여 ‘과부’ 대신 ‘선행’이라 부르고, 다리 이름도 ‘백선교’라 고쳐 불렀다.

이외에 백선행은 주로 교육 사업에 주력했다. 자신은 한평생 학교는커녕 서당 한 번 다녀보지 못했기 때문에 한글은 물론 숫자조차 읽고 쓰지 못해 굵기가 다른 수수깡에 손톱으로 표시해 금전의 출납을 기록했다. 그런 식으로 30만원 상당의 재산을 관리했지만 한 번도 계산이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못 배운 것이 서러워 자신의 재산을 기독교계 학교에 기부했다.
- 동아일보, 1925년 2월 28일자
평양에서 부인 재산가로 첫손가락을 꼽는 박구리 백선행 여사는 지난 25일 평양사립보통학교 중에서 가장 크고 장족의 세(勢)로 발전해가는 광성학교에 자기의 소유 토지 중 대동군 예포리에 있는 논 1만800여 평과 밭 3000여 평 합계 1만4000여 평을 그 학교의 기본금으로 기증했다. 광성보통학교는 감격하여 그 재산을 기초로 재단법인을 세우기로 했다. 여사의 높은 뜻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교내에 여사의 기념동상을 세울까 혹은 기념비를 세울까를 놓고 목하 교직원들 사이에 의논이 분분한 중이다.


광성보통학교, 숭현여학교, 숭인상업학교, 창덕보통학교 등 평양 시내 사립학교에 기부한 금액의 총액은 무려 18만원에 달했다. 돈을 아낌없이 기부한 덕분에 글 한 자 읽지 못하는 백선행은 위대한 교육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백선행 기념관
1928년까지 평양에는 조선인이 집회를 열 만한 공회당이 없었다. 부립공회당은 사실상 일본인의 전유물로 조선인은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집회를 가져야 했다. 조만식, 오윤선이 백선행을 찾아가 조선인 중심의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할 뜻을 전하자 백선행은 흔쾌히 현금을 내주었다. 건축비에 6만5000원 재단법인 설립비에 8만5000원을 조건 없이 기부한 것이다. 백선행 기념관 개관식에서 백선행은 자신의 인생철학이 담긴 연설을 했다.

내가 쓰다 남은 돈이 있어 돌집 한 채 짓고 몇 학교에 돈을 좀 내었기로 그다지 훌륭해서 찬하회를 한다니 세상 사람들은 부질없기도 하오. 사회에 돈을 내는 뜻? 무식한 늙은이에게 뜻 같은 게 있을 리 있나. 자손 없는 백 과부, 돈 남기고 죽어서 친척 녀석들이 재산 싸움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그런 험한 꼴이 어디 있나. 그러니 내 생전에 세상에 좋다는 사업에 썼으면 좋은 일 아니겠나?

백선행 기념관은 백선행의 기부로 지은 평양 최초의 민간 공회당으로 백선행 자신의 장례식도 백선행 기념관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여성으로는 한국 최초로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 동아일보, 1933년 5월 14일자 기사
백선행 여사의 사회장은 12일 오후 1시 정각 ‘백선행 기념관’에서 거행되었다. 오전 11시 자택에서 발인하여 영결식장으로 옮긴 백선행 여사의 영구는 장례위원의 손으로 고이 옮기어 식장에 들었는데 이날 평양 시내의 광성보통학교를 비롯하여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등은 일제히 휴교를 하여 여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영구를 옮기고 정각을 기다리기까지 식장안에는 엄숙한 애도의 침묵이 계속되었다가 정각 오후 1시에 장의위원장 오윤선 씨로부터 식사가 있어 여사의 사회장은 시작되었다. 식이 끝난 후 광성학교의 900명과 숭인의 500명, 숭헌의 450명, 청덕의 200명을 비롯하여 각 학교 대표 등 2200여 명의 학생을 선두로 각지 사회단체 대표 등 1만여 명의 참례자가 300여 개 조기, 만장, 화환 등을 가지고 5리에 뻗힌 행렬을 지어 장지로 향하였다. 이 외에 연도에는 수만의 부민이 나와 선창리부터 부청 앞 전차정류장까지에는 전차의 교통은 물론 일반 교통까지 두절되어 여사의 영구를 보내었다.


백선행은 사회만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다. 백선행의 아낌없는 기부는 다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동안 백선행은 사회로부터 엄청난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백선행은 한평생 악착같이 모은 전 재산을 학교와 사회를 위해 쓰면서 심리적 포만감과 행복을 느꼈으며, 덤으로 사회적 존경과 찬사까지 받았다. 돈이란 백선행처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써야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쓰지는 말아야 한다. 백선행의 행복한 돈 쓰기는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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