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내용 중 일부 -
언제 누가 와, 집 보러 가잘지 몰라 늘 갓을 쓰고 앉아서 행길을 잘 내다보는,
얼굴 붉고 눈방울 큰 노인이 서참의다.
칼을 차고 훈련원에 나서 병법을 익힐제는
한번 호령만 하고 보면 산천이라도 물러설 것 같았지만
지금은 한낱 복덕방 영감으로
기생, 갈보 따위가 사글셋방 한 칸을 얻어 달래도
녜녜 하고 따라나서야 하는 만인의 심부름꾼인 것을 생각하면
서글픈 눈물이 아니 날수도 없는 것이다.
안초시, 서참의, 박희완영감은 특별히 할 일없이
복덕방에 앉아서 그저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인물들인데요,
안초시는 사업실패로 서참의의 복덕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지만
더 늙기전에 어떻게든 재기하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돈만 가지면야 좀 좋은 세상인가!”
심심해서 운동 삼아 좀 나다녀보면 거리마다 짓느니 고층 건축들이요,
동네마다 느느니 그림 같은 문화주택들이었다.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물에서 이제 막 튀어나온 메기처럼 미끈미끈한 자동차가
등덜미에서 소리를 꽥 지른다.
돌아다보면 운전사는 눈을 부릅떴고,
그 뒤에는 금시곗줄이 번쩍거리는 살진 중년신사가 빙그레 웃고 앉았는 것이었다.
“예순이 낼모레...젠장할 것”
초시는 늙어가는 것이 원통하였다.
# 인터뷰. 방민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태준이 쓴 소설들 중 가장 역사의식이 뛰어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복덕방입니다. 이들은 다 구한말 인물이예요. 왜 안초시냐 초시 벼슬을 한 거죠. 과거에 급제한 거죠. 참의라는 건 이 구한말의 군인이었던 말이죠. 시대가 바뀌었고 자본주의가 훨씬 더 전면화 됐어요. 그럼 이 왕조적 질서 속에서 과거에 시험을 보고 그리고 군인벼슬을 하고 했던 사람들이 쓸모가 없어지겠죠. 삶의 활력, 이것을 되찾기 위해서 복덕방 이라는 것에 그냥 매달려 가지고 사는 것이에요. 참 비참한 얘기죠.
작가 이태준 (1904.강원도 철원군~미상)
: 데뷔-1925. 조선문단 [오몽녀]
작품 -[달밤] [해방전후] [청춘무성]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