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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장례 절차를 둘러싼 예송(禮訟)

2012-08-04

효종이 승하한 후 조선에서는 장례 절차를 둘러싼 논쟁, 즉 예송이 두차례 있었다. 1659년의 기해 예송과 1674년의 갑인예송인데 예송과 관련된 당시 배경과 의미에 관해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함께 살펴본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
사건의 발단은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할 무렵인데 효종의 장례를 놓고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복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서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고 남인은 3년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녀실기술에는 송시열이 서인의 주장을 대변해 1년 상복이 마땅함을 주장하는 기록이 실려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조선의 전통에서 상례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갑론을박은 세력 간 다툼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현종은 서인의 주장 편들어
예종이 승하한 후 즉위한 현종은 애매하다고는 했으나 결국은 서인의 주장에 동조한다. 그 당시 세력을 주도하고 있던 서인의 영향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서인들은 왕실의 상례와 사대부, 서인들의 상례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여 신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고 반면에 소외 세력이었던 남인은 왕실의 상례와 사대부, 서인들의 상례는 마땅히 달라야 함을 주장하여 왕권 강화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서인들 세력 강화의 계기
서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현종의 신임을 얻으면서 기해예송을 계기로 서인들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반면에 그들의 주장이 무시되면서 소외되었던 남인 세력은 더욱 그 힘을 잃어갔다. 그러나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 왕후가 1674년에 죽으면서 상례를 둘러싼 논쟁은 다시 한 번 불붙었는데 바로 갑인예송이었다. 이때에도 서인과 남인간의 주장은 예전과 비슷했다. 조대비의 상복을 놓고 서인은 9개월복을 주장했고 남인은 1년복을 주장하였다.

남인이 득세
갑인예송은 현종이 승하하고 나서 숙종이 즉위한 직후 결론이 났다. 즉위 당시 14살이었던 숙종은 막강한 서인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왕권 강화를 주장하는 남인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득세한 남인들은 왕권 강화에 힘쓰고 유교 경전에 바탕을 두고 시경, 서경 등을 강조하며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남인 세력의 등장을 오래가지 못하고 단기간에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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