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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의 개혁을 이끈 공민왕

2014-07-12

고려의 왕들 중에서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가장 주목을 받은 왕이 공민왕이다. 고려의 개혁을 이끈 공민왕의 업적과 비판을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박종기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와 함께 조명한다.

원나라 공주와 결혼이 강요되던 고려왕원나라 간섭기에는 고려왕에게 원나라 공주들과의 혼인하도록 강요됐다.
또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을 통해 낳은 자식만이 왕으로 즉위하도록 하는 관습이 생겼다. 공민왕의 경우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을 통해 태어난 세자가 아닌 이유로 몇 차례 왕위에 오를 기회를 놓친 후에 즉위할 수 있었다. 왕위 즉위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왕이다.

격동의 시대, 고려의 개혁에 박차공민왕이 즉위하던 시기는 격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며 권력을 차지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던 부원파들이 많았다.
따라서 공민왕은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와 신념을 갖고있었고 즉위 후 고려의 개혁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공민왕 즉위 15년 후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됐다. 공민왕은 대외적으로는 반 원 정책을 추진하고 대내적으로는 부원파를 척결하고 부정부패를 뿌리뽑는데 치중했다.

승려 신돈이 공민왕 개혁 도와공민왕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은 승려 신돈이었다. 당시에는 불교가 중흥기를 맞고있었고 대부분의 승려들은 정치와 결탁해 나름대로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반면에 신돈은 현재 경남 창녕에 있는 사찰 주지로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승려였다. 지략이 뛰어난 탓에 공민왕에게 발탁된 이후 공민왕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신돈도 소외세력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개혁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했다.

고려사에는 공민왕 폄하경세가로 신념과 능력이 있는 공민왕은 역사적으로 고려 발전에 많은 공헌을 세운 왕이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공민왕을 폄하하는 내용이 많다. 대 토목공사 추진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부도덕한 문란한 행위로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내용의 진실성에는 의문이 많다. 고려사는 조선초기의 집권 세력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 창왕이 이성계의 개혁 세력에 동조하지 않자 이들의 정통성을 흔들기 위해 공민왕의 업적까지 비하했다는 시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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