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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시대 민(民)의 저항

2014-08-30

고려 시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백성들의 반란이 이곳저곳에서 발생했다. 결국 고려의 멸망의 원인이 된 ‘민의 반란; 혹은 ’民亂‘의 배경과 의미에 대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알아본다.

역사적인 용어 민란(民亂)일반 백성들의 봉기를 역사 기록에서는 민란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민의 반란, 즉 ’백성들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일‘ 이라는 뜻의 ’민란‘은 지배층 입장에서 쓴 용어다.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백성들의 ’봉기‘나 ’항쟁‘ 정도가 적당한 표현이라고 본다.

12세기 초부터 민란 시작고려 예종 때 여진족 정벌에 나서면서 막대한 군비 충당을 위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과다한 공물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비참해졌다.
견디다 못한 부곡, 속현의 작은 마을에서부터 봉기가 시작됐다. 1100년 대 , 12세기 초에 시작된 것이다. 12세기 후반에는 본격적인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서경(북부)에서 묘청의 난, 중부 충청지역에서 망이, 망소의 봉기에 이어 1180년~1190년에는 옛 신라 경주 지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등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가장 소외된 지역 옛 신라 지역에서 봉기 절정백성들의 봉기는 가장 소외된 지역이었던 옛 신라 지역, 경주, 청도, 밀양 등지에서 가장 절정을 이뤘다.
시기로는 1200년대 초에 가장 치열했다. 원인은 농민들이 토지를 다 뺏기고 또 지나친 조세 수탈로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졌기 때문이다. 망이, 망소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1176년에 일어난 망이 , 망소의 봉기는 고려사에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고려 왕조 부정하는 백성들의 저항보국안민을 주장하는 조선시대 백성들의 봉기와는 달리 고려 백성들의 봉기는 ‘고려 왕조’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 국가 건설을 외치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또 가장 작은 마을 단위인 ‘향,소,부곡,에서 봉기가 시작된 점도 조선시대와는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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