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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태조 왕건의 리더십

2014-09-13

오늘부터는 고려 시대의 주요 왕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또 주요한 사건들을 통해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첫 시간으로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리더십에 대해 살펴본다.

전투로 이어진 삶전투를 빼고는 태조 왕건의 삶을 얘기할 수 없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20세에 궁예의 휘하에서 전투에 참여한 왕건은 42세에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왕조를 건국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통일신라, ,후백제와의 끊임없는 전투가 계속됐고 마침내 18년 후에야 천하통일을 이룬다. 그 때 나이가 60세였다. 왕건은 69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왕건의 일생은 전쟁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유일한 패배 팔공산 전투왕건이 유일하게 패배한 전투는 대구 팔공산 전투다. 왕건으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927 년 견훤이 경주를 공격하고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농락했다.
신라를 구하러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갔다. 북상하는 견훤 군대와 싸웠으나 충신 신숭겸이 전사하고 포위된 왕건의 군대 5000여 명이 전멸했다. 간신히 도망쳐 나온 왕건은 목숨을 건졌다.

전투는 패했지만 민심은 왕건에게왕건은 왕도주의를 지향하며 신라의 왕권을 존중했다. 반면에 견훤은 포악했고 패도주의를 표방하며 권력을 잡는데 만 급급했다.
또 고려와 신라의 동맹관계를 우려해 성급히 신라를 공격했다.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패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지방 호족과 민심은 견훤을 멀리하고 왕건을 따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팔공산 전투의 패배가 훗날 왕건의 삼국 통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셈이다.

고창군 전투에서 대승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패배한 지 3년 후인 930년 왕건은 지금의 안동지역인 고창군 전투에서 대승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다. 유교문화의 본향으로 알려진 안동 지역의 이름이 이 전투 이후에 ‘동쪽을 편안하게하다’라는 뜻으로 ‘安東’으로 명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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