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2014-10-04

935년 3월 후백제의 견훤이 왕위를 네째 아들 금강에게 물려주려는 움직임이 있자 맏아들인 신검이 둘째, 셋째인 양검과 용검과 함께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인 견훤을 김제의 금산사에 유폐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급속하게 진행된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자세히 살펴본다.

견훤 고려로 도망신검의 난으로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은 석달만에 절을 탈출해 남쪽 나주로 도망친다. 이후 개경으로 가서 왕건에게 귀순한다.
왕건과 견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요충지 나주가 견훤의 피난처가 된 셈이다. 왕건이 견훤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한 곳도 바로 나주 지역이였다.

왕건, 견훤을 극진히 예우왕건은 투항한 후백제의 왕 견훤을 극진히 예우했다. 후삼국을 통일하기 1년 여 전의 일이다.
왕건은 견훤을 상보라는 극존칭을 쓰고 개경에 궁궐을 제공하는 등 예우를 다했다. 아마도 왕건의 눈치를 보던 호족들에게 환심을 사기위한 제스처로 보는 시각이 많다. 정치적, 심리적 행동이라는 분석이다.

신라 경순왕도 귀순견훤이 귀순한 지 몇달 후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항복했다. 그의 사위인 박영규도 고려에 항복했다.
견훤의 고려 귀순과 왕건의 포용이 경순왕의 항복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많다. 936년 6월 견훤은 왕건에게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 신검을 쳐달라고 요청한다. 왕건은 군사들을 천안에 집결시킨 후 낙동강 지역으로 우회한 후 전주를 함락시킨다.
결국 후백제 군대는 전멸하고 신검도 포로가 된다. 이때에도 왕건은 신검을 처형하지 않고 관직을 부여한다. 이미 항복한 적국의 왕들을 포용해 후삼국 통일 후의 나라를 잘 이끌어가고자 하는 왕건의 의중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