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조국의 위기 극복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적극적인 지원으로 경제 개발에 일익을 담당했던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 지난 3일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민단은 이와 관련 민단은 지난 5월부터 지난달 초까지 전국 순회 사진전을 열었고, 오는 21일에는 도쿄 프린스호텔에서 창립 7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민단
민단의 뿌리는 재일거류민단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일본 거주 동포들은 재일본조선인연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단체가 친북 성향을 띠자 이에 반발하는 동포들이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 1946년 10월 3일 독립운동가 박열을 단장으로 하는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이 공식 출범한 것이다.
민단은 이후 1948년 8월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유일한 재일동포 단체로 공인됐다. 이후 민단은 1949년 주일한국대표부가 설치와 함께 이름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바꿨다가 1994년 ‘거류’란 두 글자를 빼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일 한국인과 민단
1945년 8월 광복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200만 ~ 210만 명 정도였다. 유학생 등 자발적인 이주민은 소수였고, 70만 명은 강제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이며 나머지도 대부분 이주노동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귀국했지만, 남북 분단 상황, 모국어를 모르는 2세의 모국 정착 문제 등으로 갈등하던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일본에 그대로 남았다.
이들이 바로 재일동포 1세대다.
이들은 조국의 분단, 모국 동포들의 냉대,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 등 3중고를 겪으면서도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키기기 위해 노력했고, 조국의 발전에 헌신했다.
민단은 우선 일본 내 차별과 박해를 철폐를 위해 노력하면서 재일 한국인의 든든한 방패 역할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42명의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이 참전, 52명이 전사했고 83명이 행방불명됐다. 이는 중동전쟁에 참가한 외국 거주 이스라엘인보다 17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재외동포 참전 기록이다.
오늘날 수출 한국의 입지도 이들이 다졌다. 수출 한국의 요람이 된 서울 구로공단은 민단이 제안해 1967년 준공됐고, 당시 입주사의 70%가 재일동포 기업이었다.
서울 올림픽 성공을 위해, 또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서도 민단과 재일동포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었다. 또 현재 일본 내 한국 공관 10개 중 9개는 재일교포들이 기부한 부지와 건물이다.
이 외에도 민단과 재일동포들이 조국 발전에 대한 기여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고 크다.
상처와 과제
민단의 70년은 조국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겪은 역사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남북 대치 상태가 이어진 것처럼 친북 단체인 총련과의 오랜 대립을 겪었다.
민단에도 세대 교체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현재 재일동포는 85만5천725명이다. 이 가운데 35만5천여 명은 일본으로 귀화했다.
동포사회는 주력이 3세, 4세로 옮겨가고 있고 1980년대 이후 건너간 이른바 ‘뉴커머’(new comer)의 비중도 높아져서 민단도 변화를 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