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패자의 역사, 궁예의 선택

2009-10-24

패자의 역사, 궁예의 선택
버림받은 왕자에서 왕이 되다.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강원, 경기, 황해 일대를 점령하며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던 왕, 궁예!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예로 정권 다툼에서 밀려나, ‘버림받은 왕자’ 신세가 되어 '세달사'라는 절에 안착하게 된다. 궁예는 승려가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불안한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892년 궁예는 세달사를 떠나 원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양길 휘하 반란군에 가담하고, 강릉 지역을 점령하면서부터 서서히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현실 사회를 개혁하려는 경향의 미륵신앙은 신라 국가의 반체제 신라 국가를 부정하는 사람들, 또는 연고지를 떠나 초적이 됐던 그런 사람 중심으로 수용이 됐다. 따라서 궁예 휘하에는 미륵신앙을 이용해서 서민 대중들, 초적들, 신라 국가에 반기를 든 인물들이 모집되었다.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모든 일에 공정했던 궁예의 성품이 병사들의 지지를 얻는데 큰 몫을 했고, 미륵 신앙의 힘을 통해 다져진 통솔력은 농민에서부터 지방 호족들까지 강원도 일대 불교 신자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
896년 철원에 도읍을 정한 궁예는 연천, 장단, 개풍 등 관내 30여 성을 더 차지하고, 지역 호족들까지 휘하에 맞아들이면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게 된다. 그런데 철원에 도읍을 정한 지 1년 만에 송악, 지금의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송악의 일등 호족인 ‘왕건 가문’을 비롯해 해상 호족들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던 궁예로서는 송악으로의 천도가 최선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후 한강의 수운을 이용해 지금의 공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한 궁예는 901년 마침내 ‘고려’라는 국호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고려’라는 국호를 정한 지 3년 만에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꾸고, 이듬해 송악에서 철원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911년 마진에서 '태봉'으로 또 한 번 국호를 바꾸었다. 이는 호족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강력한 왕권, 더 나아가 삼한 통일의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국호를 바꾸는 궁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불안정성을 보였다.

미륵신앙을 자처하다.
정치적으로 위기를 느낀 궁예가 택한 방법이 바로 ‘미륵신앙’이다. 집권 말기 신권을 바탕으로 한 ‘왕권의 강화’만이 궁예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던 것이다.

미륵을 자처해야 할 만큼 왕권이 흔들리게 됐던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909년에 있었던 ‘아지태 사건’이다. 아지태는 궁예의 충애를 받았지만 남 헐뜯기를 일삼던 신하로 같은 청주 출신의 사람을 모함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그리고 913년 아지태의 청주 세력을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왕건으로 이후 궁예의 세력은 대거 왕건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왕건은 궁예로부터 신임을 받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견제를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직위 상으로는 가장 높은 시중에 오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껴 본인 스스로 자청해서 해군대장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미륵에서 폭군으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왕권 강화에 고심하던 궁예는 915년 2월 급기야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부인 신천 강씨와 두 아들 청광, 신광까지 직접 살해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적인 치정 관계로만 볼 수는 없다. 끔찍이도 사랑했던 부인과 아들을 죽일 정도였다면 그보다 더한 국가전복이나 대역모 등 국가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천 강씨와 두 아들 청광, 신광의 죽음을 통해 일종의 고구려 호족들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정치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궁예는 자신이 역모에 의해 쫓겨날 것이라는 위협을 느끼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대거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호족 세력들은 왕건을 중심으로 더욱 더 결속력을 다지게 되었다. 궁예는 이미 철원으로 천도 후 6년 동안 도성을 지으며 과다한 노역으로 민심까지 잃어버린 상태였다.

결국 자신이 중앙집권국가를 꾀해가면서 호족들을 하나의 일사불란한 관료체계로 흡수하려고 했고, 선종이라고 하는 지방에 뿌리를 내린 사상체계를 탄압하려고 했던 것이 백성들의 민심을 잃게 했다. 또한 왕실의 존엄을 나타내기 위해 많은 세금을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백성들로부터 가렴주구가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918년 마침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반란이 시작되고 궁예는 왕이 된 지 18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후삼국 혼란기에 백성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꿈꿨지만 과도한 왕권 강화의 꿈 때문에 결국 백성의 돌에 맞아 죽은 비운의 왕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