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외교의 정석, 서희의 힘

2009-11-21

외교의 정석, 서희의 힘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시작되다

왕건 25년, 거란이 고려와의 친선을 요구하며 낙타 50필과 함께 사신단을 고려에 보냈다. 하지만 왕건의 반응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왕건은 거란의 사신 30명을 유배시키고 낙타는 굶어 죽게 만드는 등 거란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보였다. 그 배경에는 서로 혼인관계라 불릴 만큼 돈독했던 발해와 고려와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고려는 고구려 계승을 자처하며 일찍이 ‘북진정책’을 통해 발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926년 갑작스런 침공으로 그 형제의 나라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하고 말았기 때문에 왕건은 거란에게 당연한 결과를 돌려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란 또한 고려에게 받은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서기 993년, ‘적의 피를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도 그 잔혹함이 널리 소문 난 민족인 거란이 고려의 북쪽 국경 앞으로 그들의 군사 80만이 당도한 것이다. 이는 건국 이후 75년 만에 닥친 고려 최대의 위기로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거란 군을 물리친 서희의 외교 담판

광종 11년에는 당시 관직 입문은 문벌의 후광을 이용하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서희는 18살에 새로운 관리 임용법이었던 과거제도를 통해 당당히 관직에 발을 들였다. 1차 과거에서는 7명, 2회에서는 12명으로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뽑았기 때문에 당시 그들의 역할 입지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이들을 착실히 양성해 신흥 엘리트 세력으로 키워냈다. 그리고 서희는 국정을 총괄하는 관청에서부터 시작해 32살에는 송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서희는 당시 송나라로부터 ‘검교병부상서’라는 자리를 임명받았는데, 이는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정3품 명예관직으로 송에서의 외교 경험은 서희로 하여금 국제 정세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93년 거란군 80만이 침공해오자 고려의 다른 신하들과는 전혀 다른 대응책을 내놓았다.

부귀를 누리던 다른 대신들은 전쟁에서 죽거나 기득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복이나 땅을 내주는 것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서희는 거란과 정면으로 맞설 강경한 의사 표명을 내놓았고 조정의 여론은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고려 조정은 ‘먼저 적과 협상을 해보고, 여의치 않으면 결전을 벌인다’는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침략군의 진영으로 향하는 서희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고려를 침입한 거란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군의 방어 거점인 봉산군에 진을 쳤는데, 이때 이들이 밝힌 고려 침입의 이유는 고려가 옛 고구려의 땅인 거란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희는 고려야말로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로 오히려 거란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승승장구하던 거란군이 처음으로 고려군의 거센 반격을 접한 곳은 평안남도 안융진이다. 날카로운 창을 앞에 꽂고 돌격해오는 고려군의 검차는 거란군의 기마병을 무력화시켰다. 검차는 수레바퀴가 있어 이동이 편리하고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기병들의 기동력을 초기에 제압할 수 있는 효율적인 기병 무기이다. 특히 안융진 전투를 이끈 고려군 장수는 발해유민 대도수로 발해 세자 대광현의 아들이다. 이만 봐도 거란과의 전투에 발해유민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거란은 ‘안융진 전투’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거란은 수도 개성장악을 목표로 퇴로를 생각하지 않고 남진에 주력해 왔다. 그래서 고려군에 포위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자 거란군은 거란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조건 항복만은 요구하던 거란의 총사령관 소손녕은 슬며시 진짜 의도를 밝혔다. 그러자 서희는 미묘한 전세의 변화를 감지하고 여기에 거란의 본래 의도를 간파하고 나섰다. 그리고 단숨에 옛 고구려의 영토 회복이라는 국가 현안을 해결했다. 사실 국교 수교에 대한 거란의 의지는 가히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중국 대륙을 장악하려는 거란과 이를 견제하려는 송나라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고려는 외교적으로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거란의 의중을 정확히 읽어 낸 사람이 바로 서희이고, ‘국교 수교의 약속’ 덕분에 당당히 압록강 일대의 강동 6주를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는 거란과의 담판 이후, 압록강 일대에 강동 6주를 쌓아 280여리의 땅을 확실히 우리 영토로 편입시키고 15년 후, 다시 거란과 대결 국면에 빠져들었다. 강동6주 지역은 이후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 세력이 고려를 쳐들어 올 때 중요한 군사적 거점 역할을 한다. 거란군이 쳐들어 왔을 때도 강동6주 지역은 고려가 승전하는 중요한 곳이 됐고, 그 이후 고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는 거란과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고려, 양국은 10여 년간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고려의 실리외교

고려는 거란과 국교를 맺고 송나라와 단교한 뒤에도 송나라와 문화 교류를 계속 이어 나갔다. 거란의 고려 침입 이후, 송나라가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고려와 가까이 지내야 되기 때문에 고려 상인들이 송나라에 오면 세금을 면했다. 그 정도로 고려와 가까이 지내려 했고, 물건 값도 10배 정도로 가격을 측정했다.

고려는 정치적으로는 거란과 관계를 맺으면서 송나라와는 무역을 통해 계속 이득을 봤다. 송나라가 엄청난 무역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고려와의 교류를 끊지 못한 이유는 바로 ‘고려와의 국교 단절’을 막아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고려는 송나라에서는 외국의 다양한 선진 문물을, 거란으로부터는 강동 6주의 땅을 얻어냈는데 이것이 바로 고려의 실리외교였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