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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985년 고향방문단, 예술공연단 교환 행사

2018-03-29

한반도 리포트

1985년 고향방문단, 예술공연단 교환 행사
1984년 한국이 북한의 수혜지원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고 이듬해인 1985년 8월에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교환 행사를 갖기로 남북이 극적으로 합의했다. 1985년 9월에 이뤄진 역사적인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조명한다.

1985년 9월 20일 고향방문단 서울과 평양 방문
1985년 남북이 극적인 이산가족 고향방문에 합의하자 이산가족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방문단에 선정되기를 바랐다.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규모는 수많은 이산가족 수에 비해 턱없이 적은 남북 각각 50명으로 확정됐고 선발된 사람들은 부푼 마음으로 9월 20일 오전 판문점을 거쳐 각각 평양과 서울로 향했다.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은 다음 날인 9월 21일 사상 첫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헤어진 가족들과 극적인 상봉
남측 고향방문단 가운데 35명이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41명의 가족을 만났다.
몇 십 년 만에 재회한 이산가족들은 기쁨과 회한의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서울에온 북측 고향방문단 중 30명은 워커힐쉐라톤 호텔에서 51명의 가족과 만났다.
이산가족들의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과 감동적인 재회를 지켜본 전 국민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남북 예술공연단, 서울과 평양에서 교환 공연
이산가족상봉단과 함께 남과 북 예술공연단이 각각 서울과 평양을 상호 방문했다.
서울예술단은 평양대극장에서 평양예술단은 서울 중앙국립대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분단 후 처음 이뤄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예술공연단 상호 교류로 통일에 대한 희망이 더욱 커졌다.
이산가족들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지고 통일도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이후 남북 간에 논의는 많았지만 실제로 2000년까지 공식적인 상봉 행사는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긴 기다림 끝에 2000년 6.15 공동선언으로 새로운 계기가 마련됐다.

2000년 8월 15일 이산가족 상봉 재개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산가족 상봉 문제에 합의했다.
이 합의로 2000년 8월 15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이후 남북은 부정기적으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가졌고 2015년 10월까지 총 20번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아직도 만나지 못한 수많은 이산가족들
그동안 남북 간의 노력으로 이산가족 행사들이 부정기적으로 있었다.
이따금씩 적은 인원이 만나는 지금까지의 방식은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근본 대책이 되기 어렵다.
통일부에 등록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수는 13만 명, 그 중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은 7만 2천명이다.
아직도 살아생전에 헤어진 가족을 상봉하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은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준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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