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화해, 협력 분위기가 진전돼 앞으로 남북 경협 논의가 본격화되면 개성공단 재개 논의가 우선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남북 경협의 모델로 남북 간 상호 협력,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준 개성공단! 그 발자취를 되돌아본다.
‘6.15 남북공동선언’ 직후 본격 추진
2000년 6월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상호 화해, 협력을 내용으로 하는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됐다.
그 해 8월 그 동안 남북경제협력사업을 추진해온 현대그룹과 북한이 북한 개성에 6,600만 평방미터 규모의 공단을 개발하기로 합의했고 2003년 6월, 부지 조성 공사에 착수했다.
수많은 기업들 개성공단 입주 희망
개성공단 개발이 본격화되자 수많은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앞 다퉈 입주를 희망했다.
기업들로서 개성공단의 가장 큰 장점은 경제성이었다.
공장 부지의 초기 분양 가격은 한국의 1/20 수준이고 개성공단이 처음 가동한 2004년 북한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월 70달러로 중국의 1/3에 불과했다.
서울에서 개성까지의 거리는 78km! 가까운 거리와 같은 언어 사용, 양질의 인력이 장점으로 작용하면서 2004년 당시 개성공단 입주 희망업체는 1천 500여 곳이었다.
그 중 23개 시범단지 입주 기업이 선정됐고 2004년 12월에 개성공단 첫 제품이 생산됐다.
개성공단 첫 시제품 이틀 만에 모두 팔려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인력이 결합해 개성공단에서 만들어진 1천여 점의 주방용품은 2004년 12월 15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서울의 백화점으로 납품됐다.
‘통일냄비’로 불린 개성공단의 첫 시제품은 이틀 만에 모두 팔려 개성공단 성공을 예고했다.
2005년 KT가 통신공급을 개시하고 2006년 한국전력이 10만kw 송전선을 연결하면서 인프라를 갖춘 개성공단은 입주기업 23곳이 완전 가동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도약
23개 기업으로 시작한 개성공단은 2016년 133개 기업으로 입주 기업 수가 5배 이상 증가했고 2005년 1천 490만 달러였던 연간 생산액은 2015년 5억 달러를 돌파했다.
6000 명 정도였던 북측 근로자 수도 5만 2천여 명으로 늘었다. 개성공단 개발로 남측은 10년 간 32억 6000만 달러 북측은 3억 8,000만 달러 등 총 4조원 이상의 직접적 경제효과를 거뒀다. 남북경협의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 잡아 가던 개성공단은 2016년 2월 폐쇄됐다. 개성공단의 중단 배경과 재개에 대한 희망에 대한 얘기는 다음 주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