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21일 설을 앞둔 일요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총과 수류탄 등으로 중무장한 북한의 특수부대 요원 31명이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 부근까지 침입해 총격전을 벌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이 사건의 상황과 파장을 조명한다.
분단 이후 최악의 도발
1.21 사태는 분단 이후 북한이 도발한 사건 중 가장 최악으로 기록될 만큼 충격적이었다. 백주에 31명이나 되는 무장 군인들이 침투해 한 나라 대통령을 살해할 목적으로 관저 공격을 시도하는 일은 세계 역사상 찾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큰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한반도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7명의 사망자 발생
청와대를 향해 가던 31명의 북한 무장 군인들이 청와대 인근에서 경찰의 검문에 걸리면서 경찰과 북한군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민간인이 탄 버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과 중학생, 회사원 등 7명이 사망했다.
대통령 암살이 주 임무
신분이 밝혀진 북한군들은 뿔뿔이 흩어져 북한으로 다시 도주한다. 다음 날 새벽 1시 30분에 청와대 뒤편 북악산에서 북한군 한 명이 생포되는데 이후 널리 알려진 ‘김신조’다.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31명의 북한군의 침투 목적이 ‘대통령 암살’이었다고 당당히 말해 충격을 줬다. 또 그들의 침투 경로가 밝혀지면서 허술한 안보 문제도 심각하게 부상했다.
북한의 도발 이어져
1.21 사태에 이어 북한은 또 충격적인 도발을 감행했다.
이틀 후인 1월 23일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북한은 민간인과 승무원 83명이 탑승한 미국해군정보선 ‘푸에블로호’를 납치했다. 미국 정부는 즉각 이 사건을 전쟁행위로 규정하고 강력 규탄했다. 연이은 북한의 충격적 도발에 한반도의 전쟁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전국은 전쟁 공포에 휩싸였다.
향토예비군 창설 등 대북 안보태세 강화
북한의 최악의 도발로 인해 전 국민의 대북 안보태세가 강화됐다. 1.21 사태를 계기로 1968년 4월 3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향토예비군은 평상시에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전쟁 등 국가비상사태 시 소속된 직장이나 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비정규군이다.
1.21 사태 이후에도 현재까지 북한은 수시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도발을 감행해 왔고 한반도의 긴장 상태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