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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 19부-한국 경제, 날개를 달다

2015-05-12

제 19부-한국 경제, 날개를 달다
1977년 12월 22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100억불 수출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한국은 플랜트와 기계류, 선박 등 중화학 제품의 수출 호조에 힘입어 하루 전인 12월 21일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1964년에 1억 달러, 1970년에 10억 달러를 넘어섰던 한국! 7년 만에 당초 목표를 4년 앞당겨 1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다.
자원이 없는 한국으로서는 수출 증진만이 경제 부흥의 원동력이라는 신념으로 수출에 주력했던 시절! 수출 호조로 경제 부흥을 이룬 당시 상황을 조명한다.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육성으로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은 한국 경제 부흥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수출은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이었다.
기술, 자본이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노동집약적인 제조업에 의존해 매년 10% 정도의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국제 정세가 변하면서 한국 경제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71년 8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을 중지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선언도 했다. 방위산업 발전이 절실히 필요한데 그러려면 중화학 공업을 육성해야 했다. 따라서 1973년에 정부는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을 중시하는 정책 변화를 선언한다.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한 힘찬 시동
1970년 대 초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섬유가 수출 총액의 41 퍼센트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가발이 총 수출의 1/10을 차지했다.
정부는 이런 경공업 중심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바꾸기 위한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한다. 구미에 대규모 전자공업단지를 조성하고 기존 울산 석유화학단지를 확장하고 창원에는 대규모 기계단지, 여천에는 제2 석유화학단지를 준공했다.

세계인들에게 좋은 상품 제공하는 무역국으로 발돋움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시작된 한국의 경제 부흥은 1973년 중화학공업 육성을 계기로 급속도로 성장한다.
수많은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 개척에 나섰고 오일쇼크의 위기도 극복했다. 마침내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고 한국의 제품들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세계적인 무역국으로 발돋움한다. 한국의 수출 드라이브는 지속되고 한국인들의 생활 수준도 경제 발전과 더불어 향상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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