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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인좌의 난

2012-09-01

노론 세력을 지지를 바탕으로 왕좌에 오른 영조는 당쟁을 없앤다는 목적으로 인재를 두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펼친다. 그러나 소외된 소론 세력의 불만은 커지고 마침내 소론의 주도 인물인 이인좌가 1728년 반란을 일으키는데 무신년에 일어난 반란이라 하여 무신난이라고도 한다. 이인좌의 난의 배경과 의미를 건국대학교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함께 조명한다.

소론의 소외와 경종의 독살설
영조는 즉위 직후 당쟁이 나라의 발전을 해친다는 신념으로 탕평책을 추진하는데 왕정의 중심에는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있고 상대적으로 소외된 소론 중심으로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펴지면서 경종의 원수를 갚자는 취지에서 소론은 반란을 계획한다.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일반 백성, 도적들까지 합세한 가운데 치밀한 계획을 세운 소론은 이인좌의 지휘로 반란을 일으키고 청주성을 함락한다.

관군, 소론 중심으로 지휘부 구성
빠른 속도로 청주성에 이어 다른 지역으로 진격하는 반군을 맞아 영조는 소론의 반대 세력인 노론의 인물로 관군을 구성하는 전략 대신 같은 소론 출신의 장수들로 관군을 구성한다. 이런 배경에는 탕평책으로 노론, 소론 등 당파를 넘어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어 반군의 반란의 당위성을 무색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청주성을 함락한 반군은 안성으로 이동하여 안성에서 관군과 맞서는데 이 전투에서 반란군은 관군에게 무참히 패한다. 이인좌는 안성에서 죽산으로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끌려와 처형되면서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다.

반란 원인 반성한 영조
반란이 진압된 후 영조는 반란의 원인이 정쟁에 있다고 본다. 자신은 즉위 이후 고른 인재 등용을 하고 당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탕평책을 펼쳐왔지만 당쟁은 계속되고 그 결과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그 원인은 조정에 있다고 스스로 반성했다. 또 기근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한데 조정은 여전히 당쟁만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던 점도 반란의 원인으로 보았다. 이런 반성을 바탕으로 영조는 이듬해인 1729년 기유처분을 시행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추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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