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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흥선 대원군의 개혁

2012-10-20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에는 안동 김씨를 주축으로 하는 세도 정치가 계속돼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지고 나라는 기강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린 고종의 즉위와 함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정체 세력의 중심으로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는데 대원군의 등장과 그의 개혁 정치에 대해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함께 조명한다.

신정 왕후와 대원군의 결탁
어린 철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순원 왕후의 의지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등에 업고 즉위하였는데 순원 왕후가 죽고 신정 왕후가 권력의 중심에 서면서 세도 정치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개혁을 시도하던 흥선 대원군이 결탁하여 대원군의 아들인 명복 세자(고종)를 1863년에 즉위시킨다. 고종이 즉위하지만 실질적인 왕권을 잡고 조선 후기의 정치를 이끈 것은 대원군이었다. 조선 역사에서 왕의 뒤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왕후는 많았지만 왕의 아버지가 정치 전면에 나선 것은 대원군이 최초라고 기록되고 있다.

세도 정치 종식 앞장 선 대원군
고종 즉위 이후 대원군은 세도 정치 종식을 위한 개혁을 단행한다. 이런 대원군의 행보를 평소 세도 정치에 불만이 컸던 풍양 조씨인 신정왕후가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60여년간 세도 정치를 누려온 안동 김씨 중 정승과 판서급 인물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이 중에는 소북, 남인, 소론 인사도 대거 포함돼 있고 영조, 정조가 힘썼던 탕평 정치를 추구하는 대원군은 과감하게 인적 청산을 단행한다.

당파 싸움의 근원, 서원의 철폐
세도 정치의 주축이었던 안동 김씨의 주요 인물들을 대거 숙청함과 동시에 당정의 종식을 위해 당파 싸움의 근원을 서원들이라고 보고 전국에 있는 1000여개의 서원 중 47개 만을 남기도 모두 철폐한다. 그 중에는 노론의 지주였던 송시열의 화양동 서원과 송시열의 사당인 만동묘도 포함됐다. 대대적인 서원의 철폐는 많은 유림들에게 충격이었고 정신적 공황 상태를 일으켰다. 유학자들은 강한 반발을 했으나 대원군은 “백성들을 괴롭히면 공자가 살아나도 용서하지 않겠다” 며 개혁의 강한 의지를 보였다.

조선 말, 마지막 개혁의 상징, 대원군
대원군은 양반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호포법’, 국가에서 저리로 곡물을 농부들에게 대여하는 ‘사창제’ 등 의욕적으로 개혁을 시행하였지만 본질적인 조선의 개혁을 이루지는 못했고 개혁 과정에서 유림들의 반발, 또 경복궁 중건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반발 등 반대적인 요소도 많았다. 대원군은 역사 속에서 조선의 마지막 개혁을 추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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