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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 정종과 서경 천도

2014-11-15

고려 태조 때부터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3대왕 정종 때 서경 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즉위 4년 만에 정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서경 천도를 둘러싼 이모저모를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알아본다.

정종, 공신 왕식렴을 총애왕식렴은 태조 왕건의 사촌 동생으로 정종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도운 군벌로 정종의 즉위 후 지나칠 정도의 총애를 받았다. 고려사에도 정종이 왕식렴을 만석의 땅을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충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정종의 즉위를 도운 공을 치하하면서 앞으로도 서경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왕식렴의 힘을 빌어 서경 천도를 추진하려는 정종의 뜻이 담겨있다는 시각이 많다.

태조 왕건의 서경 천도 시도태조 왕건도 서경 천도를 시도했다. 개경에서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고자 한 것은 첫 째 서경이 길지(吉地)라는 믿음 때문이다.
또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 보다 북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태조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개경을 기반으로 한 호족 세력들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종, 적극적인 서경 천도 추진으로 호족들과 갈등정종은 즉위 직후 적극적으로 서경 천도를 추진했다. 이에 개경을 기반으로 한 호족 세력들이 크게 반발했다. 그들의 위상이나 권력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947년 거란을 다녀온 고려의 사신이 거란이 앞으로 고려를 침략할 계획이라는 첩보를 전하자 이를 계기로 정종은 더욱 적극적으로 서경 천도를 추진한다. 평양과 평안도 지역에 축성을 쌓고 30만의 광군(光軍)을 만들어 중앙의 왕권과 군사력을 강화하고 호족들과의 갈등은 심화된다.

정종과 왕식렴의 죽음서경 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지 2년이 되던 해 1월 정종의 최측근 왕식렴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어 3개월 뒤엔 정종도 죽는다.
무리한 서경 천도 추진으로 호족들의 원한을 사 그것이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정종은 서경 천도를 위해 축성을 건설하는 등 백성들을 과도한 사역에 동원해 원성이 자자했다는 설도 있다. 민심이 떠난 것이 정종의 몰락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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