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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또 한 번의 통일, 고려 광종의 꿈

2009-11-14

또 한 번의 통일, 고려 광종의 꿈
치열한 왕위 쟁탈전

943년, 고려의 태조 왕건이 사망한 직후 고려는 최대 혼란기를 맞게 된다. 영토는 통일됐지만 국가 체제나 제도는 채 정비되지 못했던 시기로 황실을 노리는 신료들의 힘은 계속해서 팽창하고, 민심은 흩어져만 갔다.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고려의 4번째 왕, 광종이 나섰다.

충주 유 씨 호족의 딸 '신명순성왕후'는 태조 왕건과 혼인해 장차 고려의 3,4대 왕이 되는 정종과 광종을 나았다. 하지만 문제는 왕건의 부인이 신명순성왕후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왕건에게는 29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는 호족 세력을 연합하려는 혼인 정책 때문이었다. 부인의 대부분이 당시 지방 호족 세력의 딸로 왕건과 이들 사이에서 난 자식은 총 25남 9녀이다. 이 중 11명이나 되는 아들이 왕위 계승권 자에게만 주어지는 '태자' 칭호를 사용했다. 이 때문에 왕건은 자신이 낳은 많은 아들들로 인해서 '왕위 세습'을 두고 분쟁이 생길 것을 염려해 유훈으로 남긴 '훈요 10조'에 "왕위는 맏아들 세습을 원칙으로 한다."는 항목까지 포함했다.

태조의 뒤를 이어 고려 2대 왕 혜종이 되는 장자 '무'는 다른 아들들에 비해 유독 지지기반이 약해 비호 세력이 필요했다. 이에 왕건은 당시 막강 무장 세력이던 박술희를 혜종의 후견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혜종은 즉위와 동시에 병석에 누웠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저마다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두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내고, 또 한 명의 딸을 혜종에게 시집보낸 대표적인 외척 세력인 왕규가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혜종 다음 왕으로 밀고, 황실 종친인 왕식렴은 고려 3,4대 왕이 되는 왕건의 아들, 왕요와 왕소를 차기 왕으로 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혜종의 왕위를 지키기 위한 박술희까지 팽팽한 삼파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혜종 2년 삼파전의 양상을 바꿔놓은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왕규가 혜종의 목숨을 노리고 침전에 난입한 것이다. 하지만 왕식렴의 군대가 도착하면서 왕규의 세력은 일시에 진압당하고, 당시 처단 된 일당의 수만 300여 명에 이른다. 이렇게 왕규 세력이 사라진 후, 3대 왕 정종은 혜종의 후견인이었던 박술희 세력마저 제거했다. 상대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각종 술수와 음모, 살육이 자행됐던 시기로 '고려사'는 당시 왕위 쟁탈전에 대해 혜종, 정종, 광종의 세 왕이 왕위를 계승하는 동안 문무 관리의 반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

광종은 고려의 4대 왕으로 등극한 이후 계속해 왕족의 숙청을 단행했다. 2대왕 혜종의 아들은 물론 형 정종의 아들, 심지어 배다른 형제의 목숨까지 헤치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은 26년 재위 기간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광종은 광종 7년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들을 회복시킴으로써 먼저 호족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다시 9년에는 최초로 '과거제'를 실시해 호족들이 권력을 등에 지고 관직에 진출하는 길을 차단했다. 그리고 11년에 또 한 번의 변화를 꾀했다.

등급별로 관복을 구분해 백관들의 위치를 확실하게 구분 지어버리고, 바로 그해부터 광종의 본격적인 공포 정치가 실시되었다. 광종의 즉위를 도운 인물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충신 박수경의 세 아들은 물론, 조정의 핵심 인물까지 역모의 낌새가 있는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숙청되었다. 이는 왕권에 도전하는 이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광종 대의 문신이었던 최승로가 광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즉위했을 때, 공신들과 무장들은 모두 죽고 옛 신하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4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기록할 정도다.


광종, 황제의 나라를 선포하다.

950년, 광종은 즉위한 그 이듬해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연호는 당시의 연대 계산법으로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연대를 계산했는데, 광종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중국에 대비해 고려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황제국 계산을 한다는 것인데 즉, 일종의 황제국 선포를 한 것이다.

이어 광종 11년에는 '준풍'이라는 새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수도 개경의 지명까지 황제가 사는 수도라는 뜻의 '황도'로 바꾸었다. 이는 광종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신하들은 황제에게나 하는 만세삼창을 외쳤다고 하고, 또 정전이었던 회경전문에서부터 황성까지 다섯 개의 문을 지나야 궁궐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힘은 국가 불교행사였던 '팔관회'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팔관회에 참석했던 많은 송나라 상인이나 아라비아 상인, 탐라, 여진족 사람들이 팔관회에 참석해서 고려왕을 배알할 때, 마치 황제를 대하는 의식을 갖췄다. 따라서 이 팔관회는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갖췄다는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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