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고려 충선왕, 유배 길에 오르다!

2009-12-19

고려 충선왕, 유배 길에 오르다!
고려와 원나라 왕실에서 태어난 충선왕!

1231년, 몽고의 침략을 받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긴 항쟁에 나섰던 고려가 30여 년 만에 원나라와 강화를 맺기로 결심했다. 마침 원나라의 강화 조건마저 상당히 완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화를 맺기 위해 원나라로 향하던 고려 태자 왕식은 때 아닌 고민에 빠졌다. 당시 원나라는 황제 헌종의 죽음으로 두 아들이 황제 자리를 놓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새 황제가 되고, 고려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심 끝에 고려 태자가 택한 상태는 '쿠빌라이'로 다행히도 쿠빌라이가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강화 조건은 더욱 더 완화되었다. 여기에 원나라는 고려를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 인정했다. 또한 태자가 원나라에 있는 동안 고려에서는 고종이 사망을 했고, 원나라에서는 태자를 고려 국왕에 책봉하고 고려로 귀국하도록 했다. 이 사건은 고려로 하여금 원나라가 조공책봉관계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단히 상징적인 일이다.

왕이 되어 고려로 돌아온 원종은 11년 뒤에 원나라에 독특한 제안을 하나 한다. 왕실을 보호하고 원나라와의 강화 정책을 계속 유지하길 원했던 원종은 자신의 아들인 충렬왕과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공주와 혼인을 맺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고려 왕실의 후계자이자 원나라 쿠빌라이의 외손자 충선왕이다. 쿠빌라이의 외손자이며 고려의 세자로 책봉된 충선왕은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 궁궐에 드나들며 쿠빌라이의 신임을 얻었다. 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원나라로부터 국정을 관장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은 충선왕은 고려로 돌아온 이후 아버지 충렬왕 못지않은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고려 독립을 위한 노력

한편 아버지 충렬왕은 일본 정벌에 나선 원나라군에 다수의 고려군을 참여시키면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충렬왕은 원나라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즉위 초부터 다양한 외교정책을 벌였다. 고려에만 독자적으로 존재하던 관제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등 '고려 독립'을 꿈꾸며 일본 원정 이후에 원나라에게 더 강한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원나라 성종은 의외로 고려의 이러한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는 듯 했지만 7개월 뒤 일방적으로 약속을 깼다. 성종 입장에서 충렬왕은 자신의 세조와 같이 정치 활동을 했던 인물이라 처음에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종의 입장에서 충렬왕의 강력한 왕권 구축은 원나라가 바라는 바가 아니고, 충렬왕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생각에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성종은 충렬왕을 밀어내기 위해 일찌감치 세자 충선왕에게 막강한 권한을 줬던 것이다. 그렇게 원나라의 압력을 못이긴 충렬왕은 끝내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아들 충선왕이 제26대 고려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충선왕은 왕이 된지 8개월 만에 폐위되고 다시 충렬왕이 왕위에 올랐다.


폐위! 그리고 다시 왕위에 오르다

충선왕은 원나라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고려 사대부들을 등용하고 관제를 바꾸는 등 원나라 관리들에 맞서 여러 가지 개혁 정책들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왕위에서 내려 온 충선왕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 훗날 원나라 황제가 되는 무종, 인종 형제와 가까운 거리에서 교류를 시작했다. 개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보다는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다. 그렇게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정치적 입지 굳히기에 나서는 동안 성종의 뒤를 이어 원나라의 황제가 된 무종은 충렬왕이 세상을 뜨자 충선왕을 다시 고려 국왕에 봉한다.

다시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고려에 1년 동안 머문 후,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 교지를 통해 고려를 통치하는 이른바 '전지정치'를 시작했다. 이는 원나라에 머물면서 원의 정국에 깊숙이 관여해 자신의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함과 동시에 원나라로부터 고려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충선왕의 정치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원나라의 고려 간섭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에 발맞춰 충선왕의 새로운 개혁 정책이 시도되었다.

충선왕의 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을 찾고자 고육지책으로 전지정치를 했지만 분명 한계는 있었다. 전지정치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한계는 충선왕이 직접 고려 국정에 개입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을 통해 개혁을 시도하려했던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측근 세력들의 도덕성이 개혁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충선왕의 측근 세력들은 도덕적으로 상당히 부패하고 실질적으로 개혁에 관여하면서부터 자기들의 경제적, 정치적인 이득을 챙기면서 충선왕의 개혁은 의도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충선왕! 티베트로 유학을 떠나다.

충선왕은 고려 조정의 계속되는 귀국 요구에 아들 충숙왕에게 왕위를 내주고 다시 원나라로 돌아와 계속 해서 원나라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1320년 원나라 인종의 뒤를 이어 아들 영종이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충선왕은 원나라에서의 지지기반을 잃게 되었다. 무종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것을 기대했던 충선왕은 영종 세력에 밀려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고, 이때 또 하나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바로 고려인 환관의 모함을 당한 것이다. 이에 충선왕은 급히 금산사로 피신을 떠나지만 영종의 명령을 받은 군사들에게 잡혀 머리가 깎인 채 석불사에 갇혔다. 그리고 영종은 충선왕에게 불경을 공부하고 오라는 명목으로 충선왕의 '티베트 유배'를 결정했다. 그리고 3년 뒤, 영종이 죽고 태정제가 즉위하자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귀국 2년 후, 5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원나라와 고려인 사이에서 태어나 원나라에서 최고 권력을 누리고, 고려에서도 두 번이나 왕위에 올랐던 충선왕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