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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고르바초프와 한국

2022-09-01

뉴스

ⓒYONHAP News

8월30일 세상을 떠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냉전체제 해체를 주도한 인물로 1990년 한국과의 수교에 물꼬를 트는 등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조전을 통해 “고인은 대립·갈등의 냉전시대를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를 끌어낸 지도자이자 한국과 러시아간 우호·협력 관계의 확고한 틀을 마련한 선구자였다”며 애도했다.


냉전 종식의 지도자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오랜 투병 끝에 8월30일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1931년 러시아 남서부 스타브로폴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 법대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소련공산당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가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권좌에 오른 것은 54세 때의 일로 당시 소련의 상황으로 볼 때는 ‘젊은’ 개혁적 지도자였다.

고르바초프는 권좌에 오른 후 야심찬 개혁을 시작했다. 그것은 소련의 기존 체제를 송두리째 바꾸는 것으로 ‘페레스트로이카’, 즉 재건 또는 개혁과 ‘글라스노스트’, 즉 개방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같은 그의 노선에 따라 세계 정세는 급변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맺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을 단행하는 등 군비 감축과 대립 종식의 과감한 행보를 이어갔다.

이런 과정에서 개방의 물결이 동유럽 공산권을 휩쓸어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섰고, 세계는 냉전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게 됐다.


한국과의 인연

당시 한국의 노태우 정부는 이른바 북방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냉전시대 한국 외교의 ‘블랙홀’로 남아있었던 ‘북방’, 즉 중국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과의 관계를 트는 데 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과의 관계 물꼬를 트는 것은 88서울올림픽이 계기가 됐다. 직전의 두 대회, 즉 1980년 모스크바와 1984년 LA 올림픽은 동서 양 진영이 서로 보이콧하는 바람에 반쪽 올림픽이 됐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전격적으로 서울올림픽 참가를 선언하고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한 것이다.

이후 한소 수교 교섭이 진행됐고, 1990년 3월에는 김영삼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이 모스크바를 방문,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는 등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수교에는 걸림돌도 많았다. 우선 북한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고, 소련은 선경협-후수교를 한국은 그 반대 순서를 요구하면서 난항을 겪기도 했다.

결국 양국 정상 간의 ‘빅딜’이 문제를 해결했다. 1990년 6월4일 미국을 방문 중이던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간의 전격 정상회담이 열렸고,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수교에 관한 원칙에 전격 합의했다. 경협과 수교를 동시에 타결하는 ‘빅딜’이 이뤄졌던 것이다.

이후 수교협상이 급진전, 1990년 9월 3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함으로써 역사적인 수교가 이뤄졌다. 이후 한·소관계는 경협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했고, 이는 오늘날의 러시아를 비롯한 옛소련 국가들과의 우호 친선의 바탕이 되고 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는 물론, 퇴임 후에도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는 등 한국과의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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